의학은 치료될 수 있을까?-의학연구의 실상

의학연구의 실상- 점심시간 이후의 대약진

 

1980년대 이후로 의학연구는 국제적 비즈니스와 경제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의학산업 복합체의 지적인 동력이었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의학연구가 진실에 대한 갈구와 질병을 치유하고 생명을 구하고자하는 열정만이 동기가 되어 이타주의자들이 수행하는 가치있는 박애주의적 노력으로 비치고 있다. 많은 자선단체들은 이런 숭고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모금을 하고 심지어는 단체를 운영하는 것 자체가 비즈니스 영역이 되기도 한다. 의학연구는 좋은 일이고 더 많은 돈이 사용될수록 좋다는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가 있다. 이런 자선단체 돈을 기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의학연구의 대부분이 시간과 돈의 낭비라는 사실을 알면 놀랄 것이다. 의학연구가 돈과 시간이 낭비가 되는 이유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아주 많은 부분이 잘못된 방식으로 수행되고 있고 두 번째는 연구가 연구자 그리고 연구자와 연계된 상업적 이해관계에 도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연구 펠로우로 3년간 일하면서 아주 이상한 연구문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연구 펠로우는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의사가 몇 년간의 임상경험을 가지고 박사학위(MD 또는 PhD)를 받기 위해 임상을 벗어나 연구에 종사하는 프로그램이다. 내가 연구 펠로우를 한 이유는 의학분야에서 경력을 쌓고 싶어하는 대부분의 의사들과 동일하다. 1980년대에는 병원에 자리를 얻는데 경쟁이 심했다. 병원 전문의 자리는 누가 은퇴하거나 죽어야 생겼는데 공고가 날 때마다 20명 이상의 지원자가 몰렸다. 전공의 자리를 얻는 것도 비슷하게 경쟁적이어서 이력서에 연구경력이 있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지원자들은 임상 기술보다는 연구 경력에 의해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야망이 있는 의사들에게는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고 박사학위를 얻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삼년간 지역에 수련병원에서 일한 다음에 우연한 기회에 소화기내과의 전공의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이 분야에서 커리어를 추구하겠다는 열망 같은 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연히 제안을 받았을 뿐이었다. 소화기내과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아일랜드를 떠나야만 했다. 왜냐하면 1980년대에는 아일랜드에는 전문의 수련과정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문제를 지역의 전문의와 상의하였을 때 그는 단지 자신이 거기서 수련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영국의 에딘버러로 가서 수련을 받는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다. 그는 그곳의 소화기내과 교수에게 편지를 써 줬고 그 교수를 만났을 때 제약회사에서 지원을 받는 연구 펠로우 자리를 제안 받았다. 당시에는 제약산업에서는 특히 소화기내과 쪽 연구 펠로우 자리에 많은 돈을 지원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서 의학계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세금 혜택도 받았다. 교수는 돈을 지원하는 제약회사를 위해 작은 임상시험을 해야 하지만 그 일에 많은 시간을 쓸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내 연구의 주요 주제는 위장관의 면역체계 였다.

내가 연구 펠로우를 시작했을 때 교수가 내 연구의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교수의 제안은 좀 모호했다. 그는 몇 주 동안 도서관에서 관련 문헌을 읽고 기본적인 실험 테크닉을 익혀두라고 했다. 병원 도서관에서 대장 면역체계라는 모호한 분야에 대한 논문을 탐독했다. 두 명의 부끄럼을 많이 타는 이탈리아 출신 연구원들과 실험벤치를 공유했는데 그들은 소장에서 채취한 조직을 잘게 자르고 다양한 방법으로 염색하여 세포 종류별로 카운트 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카운트 방법은 염색한 조직을 현미경으로 보면서 특정 세포가 보일 때마다 숫자를 계수기로 세는 방법이었다. 많은 시간을 내부상피임파구(intra-epithelial lymphocyte)라고 불리는 세포 갯수를 세면서 보냈다. 한 친절한 기사가 항체 수준을 측정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실험실 스태프들은 연구 펠로우를 커리어나 쌓으려고 하는 아마추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나의 교수는 많은 연구 펠로우들이 세계 각처에서 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고 실험실의 휴게실에는 지도가 있었는데 펠로우들의 출신지 나라에 작은 국기가 표시되어 있었다.

내 봉급이 지불되었던 연구 과제는 셀리악병에 대한 신약 임상시험이었다. 셀리악병은 음식에서 글루텐을 제거하면 효과적으로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이 1940년대 후반부터 알려져 있었다. 음식을 조절하면 되는 병에 치료약을 개발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 생각은 여전히 지지되고 있다. 어떤 환자들은 식이요법을 엄격하게 하기 어렵다는 좀 이상한 이유로 말이다. 이 임상시험은 이탈리아 펠로우가 시작했고 내가 넘겨받아 더 많은 환자들은 모집했다. 환자들은 임상시험 시작 전에 소장에서 조직검사를 받았고 보통식사를 하면서 이 약을 세 달 동안 먹도록 했다. 그런 후에 호전이 있는 지를 보기 위해 다시 조직검사를 했다. (셀리악병은 식이조절을 하면 소장 조직검사에서 호전이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 임상시험은 윤리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이미 병의 원인이 알려져 있고 치료방법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왜 이 약이 치료제로 사용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생물학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상한대로 이 임상시험에서는 약물의 이득이 확인되지 않았다. 임상 시험이 끝난 직후에 환자 한명이 셀리악병과 관련된 희귀한 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이 약이 암을 직접 유발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환자에게 임상시험 기간 동안 효과가 없는 약을 복용하면서 글루텐을 계속 먹도록 했다는 사실은 이 환자에게 분명이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당연히 이 임상시험의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고 싶었다. 제약회사의 지원을 받은 것이라 그 결과를 학술지에 발표할 때는 사전에 제약회사에 보여주도록 계약이 되어 있었다. 제약회사에서는 이 약이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당연히 이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데 반대했다. 사실 제약회사가 걱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학술지에서 검토자에게 검토를 의뢰하는 절차도 거치지 않고 바로 출판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유의미한 결과가 없는 임상시험 논문은 출판이 잘 안되기 때문에 생기는 출판바이어스를 처음 경험한 사례였다.

교수에게 특정 연구프로젝트에 참여시켜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장 조직에서 이미지 분석이라고 불리는 컴퓨터화된 방법을 이용하여 세포의 숫자를 계산하는 기술을 개발하는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다. 우리는 연구가설에 대해서는 한 번도 논의를 하지 않았다. 주 관심사는 데이터를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교수는 나와 짐이라고 불리는 기사 한명이 다른 부서에 이 일을 하도록 주선하였다. 짐과 나는 별 성과 없이 이 이미지분석기 작업을 하였다. 우리가 얻었던 유일한 영상은 찌직거리는 텔레비전 영상같은 이미지였다. 몇 주를 황당하게 보낸 후에 우리는 이 방법으로는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미지분석기 작업이 별 성과가 없었다는 것을 교수에게 보고했다. 유일한 선택은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교수는 1970년대에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연구를 명성을 얻었는데 관심영역을 인간에 대한 연구를 옮기고 싶어했다. ‘전체 장 세척이라고 불리는 동물실험에서 사용하던 기법을 인간에게 적용하는데 관심이 많았다. 나는 이 방법을 개발하는 일을 맡았는데 자원자에게 댓가를 지불하고 대장내시경 준비를 위해 사용하는 관장액인 생리식역수(GoLytely)4리터를 마시게 하였다. 자원자가 라거맥주 색깔의 용액을 배설하면 이 세척액을 모아서 여과시키고 필터링하고 이 세척액 속의 항체를 보전하기위한 보존화학물질을 첨가하였다. 나는 병원 화장실을 돌아다니며 설사로 가득 찬 철제 용변기를 쳐다보면서 필터링을 시작할 단계인지를 주의깊에 관찰하였다. 사람은 모든 일에 더 적응할 수 있다. 실험에 자원한 사람들은 동물실험실의 기사들로 항상 돈이 부족했다. 좀 냉소적이던 한 동료는 실험쥐를 충분한 숫자가 죽으면 박사학위가 만들어지는 동물로 정의하기도 했다. 동물실험실에는 불쌍한 실험쥐와 원숭이들도 있었고 염소도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나는 이 불쌍한 동물을 죽이는 일은 피하려고 했었는데 하루는 이탈리안 펠로우가 능숙하게 쥐의 꼬리를 잡고 흔들어 머리를 실험실 모서리에 부딪혀서 쥐를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

망치를 가진 사람 눈에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속담은 많은 의학연구, 특히 내가 한 연구에도 적용된다. 나는 곧 전체 장 세척에 참여할 진짜 환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어차피 대장내시경 검사를 위해 사전 조치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환자들도 일부 있었다. 이 이 방법을 이용해서 모든 항원에 대한 항체를 측정하여 그 결과를 모두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이 기법(이것을 기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면)을 크론병을 물론 강직성척추염이라고 불리는 관절에 이르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병에 적용하였다. 다른 펠로우는 침-내가 한일에 비해서는 눈과 코에 덜 역겨운-을 모아서 역시 모든 가능한 비교를 하였다. 질문 또는 가설로부터 연구를 시작하는 대신 우리는 기법으로부터 시작해서 가능한 한 많은 데이터를 만들었다. 나는 여러 종류의 환자에서 전체 장 세척액‘, 장 쥬스, , 혈액을 모으면서 2년을 보냈다. 그 다음 2년은 여러 편의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 논문도 썼다. 약간의 성취에 우쭐해져서 어리석게도 연구 쪽으로 커리어를 쌓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좀 더 높은 자리에 임용되기도 했다. 이것은 실수였는데 나는 곧 학술활동에 환멸을 느꼈다. 그 자리에서 18개월 가량을 보낸 후에 그만 두고 요크셔의 선임 전공의 자리를 이동했다. 나의 연구 경력은 창피하게 소멸했지만 얻기 힘든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진정한 과학자로서의 호기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통상적이 루트를 따라 의학계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이 부족했고, 냉소적이었지만 충분히 냉소적인 것은 아니어서 란셋에 논문을 실은 것과 박사학위를 자랑스러워했는데 그것으로 충분했고 다시 임상으로 돌아오면서 안심이 되었다. 내가 연구 펠로우로 보낸 3년은 순전히 공리주의적으로만 보면 잘 보낸 기간이다. 나는 내가 얻기로 마음먹은 것을 모두 성취했지만 그 분야는 계산적이 신이나지 않는 비즈니스였고 내가 생산한 것 중에 지속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비록 과학지식에 어떤 의미있는 기여도 못했지만 의학연구가 어떻게 수행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배웠다. 과학적 호기심에 영감을 받는 과학자는 거의 없었고 내가 만남 고참 연구자들은 승진, 연구비, 논문, 수상 같은 동기부여가 되었다. 의학연구실험실은 일종의 공장으로 데이터라는 원료를 생산해냈다. 이런 데이터로부터 여러 가지가 만들어졌는데 학회 발표, 학술지에 논문 발표, 박사 학위, 연구비 신청, 심지어는 마일리지까지. 데이터가 산출된 체액을 제공하는 환자는 말할 것도 없고 병실에서 벌어지는 일도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학문 계층에서 최상위 계층인 브라만에 해당하는 교수 또는 부서의 장, 학장은 학문적 요소가 거의 없는 부서에 대한 임명권까지 가졌다. 그들은 위원회에 참여하여 서로에게 연구비를 나눠주었다. 그들의 임상적 역할은 명목상만 있었다. 당시에 NHS의 수련병원은 주로는 경험 많은 주니어 닥터에 의해 돌아갔다. 주로 외과분야에서는 거의 40세에 이르러서야 전문의로 임명되었다. 고참 전공의들은 전문의보다 임상적으로 더 능력이 있었고 기민했다. 특히 학문분야에서는. 내가 아는 한 학문 전문의는 일주일에 한번 회진을 돌았는데 그의 처방은 너무 이상하고 위험해고 틀린 것이어서 병동 간호사와 고참 전공의는 전문의가 회진돌 수 있게 환자들에게 한번 안내를 한 다음 진짜 회진을 다시 돌았다. 다른 전문의는 외관의였는데 수술장에서 너무 위험하게 수술을 해서 주로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직으로 승진했는데 그 이유가 그를 수술장에서 멀찌감치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고참 전공의에게 의존함으로서 브라만들에게는 자유롭게 연구라는 게임에 몰두할 수 있게 해줬고 그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주로 충원하여 이 체계 자체지속적인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연구 펠로우들과 어울렸는데 우리는 주로 의사들의 식당에서 점심시간에 만났다. 금요일에는 선술집에서 만났다. 우리는 걱정스럽게 학회에 발표할 내용의 진행상황과 게재 승인을 받은 논문을 비교하였다. 그들 모두는 지금은 크던 작던 명성이 있는 교수들이다. 두 명은 의과대학의 학장이다. 나는 그들과 한번도 과학에 대한 논의한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경력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유전학은 의학 연구 분야에 들어왔는데 연구 펠로우들은 유전학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다. 일찍 유전학 연구를 시작한 사람들은 많은 연구비를 받았다. 내가 함께 일했던 존경할만하고 저명한 교수들은 임상경험은 거의 없는 유전학 연구자로 대체되었다. 학문적 의학 분야로의 문화적 전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의과대학의 교수는 일종의 평등한 자들 중의 첫 번째’(first among equals)로 주로 남성이고 임상가로서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고 의대학생들을 교육할 때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기대되었고 여유가 되면 연구도 수행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쯤에는 이 모델이 폐기되었다. 고참 연구자들의 역할을 실험실을 위해 연구비를 따오는 것이 되었다. 그들은 주로 분자생물학자로서 유전학 또는 다른 세포학 사이토카인 면역 등의 전문가였다. 그들은 교육은 젊은 연구자에게 위임하고 임상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런 새로운 부류의 교수들은 자랑스럽게 모든 임상업무를 서약했고 경력은 기사작위를 받으면서 정점에 올랐다. 근거기반의학의 설립자인 데이비드 사켓(David Sacket)2004년 영국의학회지(BMJ)에 기초의학자들은 연구비주는 기관을 장악해서 환자들에 봉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개인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것에 더 가치를 주는 연구정책을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모든 고참 의학자들의 자리는 이런 새로운 형태의 의사들에게 돌아갔다. 진료하는 임상의와 연구자의 간극은 더 크게 벌어졌다.

나는 내가 연구자로 있었던 때를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외부인의 시각을 가지고 내부에 접근할 수 있었다. 때로는 하는 일과 정서적으로 너무 유리되어 마치 의학연구 행태에 대한 현장조사를 하고 있는 인류학자가 된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해리 콜린스라는 사회학자는 전문가에 대한 전문가로서 중력파 물리학자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수행했는데 그는 물리학자들을 좋아했다. “그들은 아주 이상적인 학자였다. 그들은 약간 미친 것 같은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는데 경제적 보상 없이 순전히 학문적 이유만으로 그 일을 수행했다.” 콜린스가 관찰한 물리학자들은 고고한 과학의 이상-정직, 진실성, 일반화, 자신의 생각을 기꺼이 다른 사람이 조사할 수 있게 제공, 이해관계 없음 등-을 체화시킨 것이다. 나는 의학연구를 지켜보면서 그런 이상주의를 본 적이 없다.

연구 펠로우가 끝나갈 무렵 나는 트루먼쇼 같은 이상한 경험을 했다. 나는 점심시간 이후 대약진(The Greatest Breakthrough since Lunchtime)’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북페어에서 우연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의사인 저자는 콜린 더글라스라는 필명으로 책을 썼다. 이 책은 1977년 처음 출간되었다. 먼지 붙은 장의 안쪽 면은 이 얇은 책의 1970년 음탕한 분위기를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보여주는데, 토프리스로 의사의 가운을 열어재끼는 안경 낀 여성의 사진.

책 표지에는 게으름, 음탕함, 취함, 지루함, 간음 그리고 의학연구에 대한 소설이라고 광고한다. 이 책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캠벨은 에딘버러의 수련병원에서 일하는 젊은 의사로서 아마도 작가 자신이 모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에서는 에딘버러에서 일하거나 수련받은 의사에게만 관심이 있을 법한 소설이지만 나는 호기심에서 이 책을 샀다. 그 책을 읽으면서 더글라스가 기술하는 장면이 익숙하다는 것을 느꼈다. 주인공은 병원 수련을 마친 후에 연구 펠로우를 하게 되는데 제약회사에 지원을 받고 피비라는 학술적 의사의 지도를 받는다. 피비로부터 내가 받은 것과 똑 같은 격려를 받는다. ‘그녀는 대장 점막 실험의 기본 방법을 제안하면서 실험이 진행될 실험실에 대해 말한다. 그는 하루 이틀 실험을 익히면서 그 분야에 대해 첫 일주동안 공부를 하게된다. 책에 나오는 많은 고참 의사들은 나같은 아웃사이더도 누군지 알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캠벨은 분변 비타민에 대해 일하게 되는데 나의 전체 장 세척액 항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더그라스는 이 일을 지루함을 잘 표현했다. 캠벨은 설명들은 대로 이 분야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의학도서관에 간다. 작은 규모의 성당이 비슷한 시간에 그러하듯이 도서관에도 사람이 별로 없고 지역사회에서 가장 신실하거나 아니면 가장 게으른 사람들만 있었다. 이 책에는 강박처럼 쥐의 프로스타글란딘에 대한 논문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여자도 나온다.

캠벨은 자신의 시간 대부분을 다음 성적 정복대상에 대해 계획하면서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더글라스는 캠벨이 간호사와 마주친 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그들은 서로 좋아했고 성관계는 대단했다.) 그리고 실험실 기사(크리스트 나는 그게 필요해) 그는 빠르게 연구자의 환상에서 벗어났다. 그의 보스인 피비는 분노한 사이코패스이고 그의 윗 전공의이는 호사가이자 사기꾼 이었다. 그는 그의 보스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있는 지를 동료들과 함께 생각하였다.

 

우리 모두는 그녀가 교수가 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어. 사람들과 환자들 모두‘. 캠벨은 사악한 삼촌처럼 웃으면서 어린이들, 이게 바로 의학연구의 뜻이지

그의 동료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당신은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거죠? 90년대에는 교수가 되고 싶은거죠?’

그렇지 않아. 내가 충분히 비열하지 않거나 아니면 충분히 관심이 있지는 않아서 그렇게 결정할 수 없어

 

이 책은 다운증후군에 걸린 여자 아이가 죽으면서 끝난다. 그녀는 동의도 없이 교수와 선임 전공의에 의해 위궤양치료약물의 임상시험 대상이 되었고 이 약물에 의한 골수부전의 결과로 사망하였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내 월급을 지불했던 어리석고 쓸모없는 약물 시험 대상이 된 후 죽은 셀리악병 환자가 떠올랐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캠벨은 연구 펠로우 직을 그만두고 임상으로 돌아간다.

어떻게 10년 전에 출간된 가벼운 잡동사니 책이 정확하게 나의 연구 펠로우 생활을 그려낼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병원의사의 고백과 일리치 식의 의학연구에 대한 비판의 이상한 조합인 이 소설은 내가 힘들게 얻은 교훈의 일부에 대한 결정체이다. 의학연구는 냉소적인 출세주의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게임이다. 데이터가 아이디어보다 더 중요하고 교수직이 환자보다 더 중요하다.

by 카이로스 | 2019/08/31 23:13 | 의학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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