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은 치료될 수 있을까?-에필로그

의학의 황금시대에 의학은 엄청난 명성을 얻었고 인간의 삶과 죽음은 의료화되었다. 전세계적으로 의학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의료-산업 복합체는 엄청난 비용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미약한 위안만을 주고 있다. 복합체의 주된 걱정은 그 자체의 생존이고 지속적인 지배력이며 윤리적으로는 황금시대의 과학적 이상을 배신하고 있다. 임상진료 또한 방대한 산업이 되어서 주로 퇴행성질환과 노화를 다루면서 전체 인구집단을 검진, 질병인식향상, 질병 팔이, 예방적인 처방 등을 통해 환자화로 몰아가고 있다.

환자들은 점점 더 의학 때문에 불행하다. 왜냐하면 의학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 또래는 되는 사람들만이 의학의 황금시대 이전에 진짜 아프다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들 역시 불행하다. 그들은 자신의 힘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점점 더 많은 책임과 요구가 자신 앞에 놓여 있다. 병원은 노인들을 처리하는 곳이 되었고 인간 감정과 행동의 정상적인 변이가 약물치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존재론적 문제들이 의사들이 풀어할 문제로 되고 있다. 의사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의학은 유사 종교가 되고 있다. 환자들이 기존의 믿음을 배신하고 포기하도록 부드럽게 유도하여야만 한다. 조지 버나드쇼(George Bernard Shaw)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건강을 다 사용해버리고 더 오래 살지는 말라고 충고했다. 우리도 비슷하게 우리 환자들을 맥코믹(James McCormick)이 얘기한 변화된 쾌락주의의 삶으로 이끌도록 격려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피할 수 있는 위험들로 둘러싸인 여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만끽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 의사들은 우리의 지식을 과도하게 높게 평가하고 환자들에게 과도하게 약속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죽음과의 전쟁은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의 에너지를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가지고 있는 것을 균등하게 공유하는데 다시 초점을 맞추고 치유와 고통 완화를 중시하는 새로운 의학으로 향해야 한다.

현재 의학의 우선순위는-중세의 성당 같은 수련병원과 생의학적 연구를 정점으로 하고 지역사회와 호스피스는 바닥으로 하는-반대가 되어야한다.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으로 낙관하지는 않는다. 미래에도 강력한 사회적 힘이 현재의 컨센서스가 지속되도록 보장할 것이다. 이런 사회적 힘에는 모든 인생의 상업화, 거대 다국적기업의 과도한 파워, 정치와 전문직의 쇠락, 순응과 규제의 경직화, 안전에 대한 숭배,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의 나르시즘,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의 영적인 왜소화가 우리를 지속적 감시와 유지를 필요로 하는 디지털화된 기계로 축소시키고 있다. 의료-산업 복합체라는 것이 광대하고 조직화되고 지각력있는 음모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만큼이나 오류투성이고 비이성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강대해져서 의학이 이반 일리히가 말한 티핑포인트-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를 끼치는-를 지나고 있다. 의학 분야에서 어떤 형태이든 새로운 발전이나 치료법이나 또는 패러다임이 발표되면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첫째는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가? (Cui bono?) 둘째는 그것 때문에 인생이 더 행복해지는가? 이 질문들을 유전체학, 디지털 건강, 질병인식캠페인에 물어보면 대답은 명백하다.

기질적으로 나는 수도원이나 도서관이 더 어울리는 사람인데 운명이 나를 먼지 날리는 경기장으로 불러내었다. Aoibhinn beatha an scolaire (학자의 삶은 얼마나 달콤한가?) 17세기 무명의 아일랜드 시인이 쓴 말이다. 나는 때로는 학자로 사는 것이 어떠했을까 생각해보지만 이것은 나태난 일이다. 나는 대신에 고통과 질병, 죽음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고 동시에 친밀감, 유머, 삶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나는 견기기 어려운 책임감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란다. 나의 젊은 동료들은 내가 젊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유행이나 오류에 쉽게 유혹된다. 하지만 이런 것을 지적하는 일은 그들을 불쾌하게 할 것이다. 나는 내 주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파악하고 의학이(임상의학이) 회의론자에게는 어려운 직업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30년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적 회의론은 동정심만큼이나 의료행위에 필요하다. 의사들은 인간적인 동시에 철학자 흄(Hume)같은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정년에 다가옴에 따라 이렇게 하는 것이 아주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덜 어렵다. 나는 환자를 볼 때 소송이나 프로토콜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친구나 친척 대하듯이 환자를 대한다. 솔직히 의사는 그렇게 하여야 한다. 나는 이런 솔직한 태도가 환자들에게 자신들이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는 것을 보고 즐거운 마음으로 놀라곤 한다. 의사들과 환자들 모두 의료-산업 복합체의 노예가 되어 왔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반란을 해야 할 때이다. 우리 사회는 노인과 죽음을 새로운 방식으로 수용해야 한다. 의사들은 전문성과 임상적 판단이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우리가 하는 일에 핵심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프로토콜이나 정부의 지시, 처벌의 공포 뒤에 숨으면 안되고 단지 삶의 조건이 좀 더 견딜만하게끔 해주면 된다. 과학과 진료의 학설은 항상 새롭게 바뀌지만 의료행위의 본질은 동일하다. 우리는 완치 시키지 못할 수 있지만 여전히 치유를 할 수는 있다.

나의 젊은 시절은 지금 나의 변절을 승인할 것이다. 나는 이 책으로 이반 일리히, 그의 제자인 존 브라드쇼(John Bradshaw), 체코 출신의 비판론자인 페트르 스크라바넥(Petr Skrabanek), 의료사상가인 리처드 아셔(Richard Asher)의 영혼이 어느 정도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by 카이로스 | 2019/08/03 13:55 | 의학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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