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문구가 언제부터 내 머리 속에 들어왔는지 정확하게는 잘 모르지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2016년의 어느 시점부터 이 문구가 생각나기 시작했는데 묘하게도 뭔가에 대해 고민하거나 불안해할 때 떠올라서 마음을 진정시켜주 곤 했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래 뭔가에 대해 걱정한다는 것은 최소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니 최소한 최악의 상황은 아니군

이 문구가 갖는 위안 기능이 정말 힘든 상황에서도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검증을 거치지 못했다. 다만 위로는 부모를 봉양해야 하고 아래로는 자식을 걱정해야 하는 50대 가장이 일상사에서 마주치는 고민과 걱정거리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이 문구를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흔히들 데카르트는 신 중심의 중세철학에서 이성 중심의 근대철학으로 물꼬를 연 대표적인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신과 교회의 권위가 무너져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절대적이고 확고한 진리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해 본 결과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로 발견한 것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인 것이다. 이 명제는 나는 생각한다나는 존재한다의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먼저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는 도저히 의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 생각하는 것일까?’라고 의심하는 순간 바로 의심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가 확실하다면 생각하는 주체인 나는 존재한다라는 사실도 동시에 확실해진다. 물론 나는 생각한다(cogito)와 나는 존재한다(sum)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다. 추론으로 보는 입장은 cogito로부터 sum이 도출되는 것이므로 고로(ergo)’라는 말이 정당하게 필요한 반면 또 다른 입장은 두 가지가 직관적이고 독립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cogitosum은 나의 직접적 자기의식 과정에서 동시에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고로를 빼고 나는 생각하며, 존재한다(Cogito, sum)’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한 걸음을 더 나가면

나는 하나의 실체로서 그 본질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므로 존재하기 위해서 아무런 장소도 필요없고 어떠한 물질적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생각하는 나와(나의 정신)과 육체는 명확하게 분리되면서 육체가 탐구의 대상이 된다.

데카르트에 의한 정신과 육체의 분리는 이후 과학, 특히 의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현대 의학이 기반하고 있는 생의학적 모형에서는 인간의 하나의 기계같은 존재로 설명하고 질병은 기계의 부속품이 고장난 것이기 때문에 부속을 교체하면 건강이 회복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한 데카르트 철학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저작이 방법서설에서 설명하고 있는 진리탐구 방법의 규칙 중 문제를 가능한 잘게 나누어 생각하고 가장 단순하고 알기 쉬운 것에서 시작하여 가장 복잡한 인식에 이를 것은 의학과 대부분의 현대과학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환원주의(reductionism) 접근 방식의 원조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라는 것이 확실한 만큼 숨쉬는 나’, ‘걷는 나’, 또는 어떤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찍는 나가 존재하는 것도 확실한 것이 아닐까? 여기에 대한 데카르트의 답은 아니오이다. 신체적 행위는 나의 본질이 될 수 없고 나의 존재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생각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지 그 어떤 다른 행위도 본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란 하나의 생각하는 것이고 생각하는 동안만 존재한다. 만일 내가 생각하기를 아주 그친다면 그 순간 나는 존재하기를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주장한 데카르트로서는 당연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경생리학자 다마시오가 데카르트의 오류라는 책에서 지적했듯이 인간의 이성적 사고가 정서적 반응 및 생리적 반응과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감안하면 인간의 어떤 활동으로부터도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생각한다만큼이나 확실하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좋아하는 활동으로부터 자신이 존재함을 입증하고 나아가 존재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자신의 존재함을 확인하면서 한 가닥 위안까지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터이고.

 

by 카이로스 | 2017/01/28 22:13 | 일반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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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지성의 전당 at 2019/02/02 17:16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존재한다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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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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