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08일
승강기의 광고공해
요즘 웬만한 아파트는 승강기 안에 LCD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다. 승강기에 모니터를 설치하는 아파트가 느는 이유는 모니터가 주민들의 요구를 잘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항상 무엇인가를 하고 있어서 human being이 아닌 human doing으로 불리는 현대인에게는 승강기 안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시간이 견디기가 쉽지 않다. 승강기 안에 모니터가 있으면 다양한 정보와 광고를 보면서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것이다. 또 승강기에서 만나면 반갑게 서로 인사해야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아파트 이웃 간에도 좁은 공간 안에서 어색한 시선을 처리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런저런 공지사항을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게시판 역할까지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광고회사에서 무료로 설치를 해 줄 뿐 아니라 광고수입의 일부를 다시 아파트에 돌려주니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고'다.
그러나 '공짜점심은 없다'라는 경제학 원칙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모든 주민이 의무적으로 광고를 봐야하는 것이다. 승강기라는 폐쇄공간에서 모니터를 통해 나오는 광고를 피할 재간이 없다. 어차피 광고를 보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으니 잠시 광고 좀 더 보는 것이 대수로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광고를 보면 짜증나는 사람들에게는 강제로 광고를 봐야 한다는 것이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광고의 내용에 따라서는 어린이들에게 유해할 수도 있다. 요즘 어린이 비만이 크게 유행하고 있는 중요 원인은 열량은 높고 영양가는 낮은 패스트푸드를 과다 섭취하는 것이다. 최근 복지부에선 2010년부터 햄버거, 과자 등 고열량·저영양 식품의 TV 광고시간을 제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단 30초만 TV 광고를 봐도 어린이들은 그 식품을 선호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에도 몇차례씩 승강기를 이용하는 어린이들이 모니터를 통해 반복적으로 패스트푸드 광고를 보게되면 나쁜 식습관을 갖고 결국엔 비만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아직까지 승강기에 모니터가 없지만 모니터설치의 대세를 빗겨가진 못했다. 드디어 지난주에 승강기 안에 모니터를 설치하겠다는 입주자대표회의 결정사항이 공지된 것이다. 입주자대표회의는 아파트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자원 봉사하는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일반 주민들은 입주자대표회의의 결정에 토 달기가 부담스럽지만 광고공해를 막아야겠다는 직업병(?)이 발동해 아파트 홈페이지에 모니터 설치를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
요지는 입주자대표회의가 아파트 단지 승강기 안에 일률적으로 모니터를 달아서 모든 주민이 하루에 2번 이상, 일년 365일 강제적으로 상업적 광고를 보게 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또 승강기가 공공시설이라도 해당 동의 주민들만 사용하는 사적공간의 성격이 강하므로 모니터를 설치하려면 동별 의견을 물어 찬성하는 동에만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사이버공간에서 뜨거운 찬반논쟁이 벌어졌다. 전혀 대표성이 없긴 하지만 의견을 올린 사람들을 분석해보니 6:4의 비율로 찬성이 많았다. 주민 대다수가 찬성할 것이라는 가정아래 입주자대표회의에서 모니터 설치를 결정했지만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니 지금이라도 의견수렴절차를 거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의견수렴을 해서 결정한다는 것이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일일이 주민의사를 묻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고, 의결정족수를 어떻게 할지도 어려운 문제이다. 대한민국 아파트단지 중에 이런 절차를 거쳐 모니터를 설치한 곳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만일 입주자대표회의가 주민의사를 수렴한 의사결정을 한다면 우리 아파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민주적인 아파트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가장 민주적인 아파트에 살면서 동시에 광고를 안보고도 승강기를 탈 수 있는 행운을 내가 누릴 수 있을까?
# by | 2008/12/08 22:11 | 일반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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