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뉴욕타임즈가 뉴욕타임즈에 실은 전면광고인데 트럼프 시대 미국의 언론 환경을 잘 보여주네요.


the truth is hard 진실은 견고하다.

the truth is hidden 진실은 숨겨있다.

the truth must be pursued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the truth is hard to hear 진실은 알기 어렵다.

the truth is rarely simple 진실은 간단하지 않다.

the truth isn't so obvious 진실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the truth is necessary 진실은 필요하다.

the truth can't be glossed over 진실은 얼버무려질 수 없다.

the truth has no agenda 진실에는 아젠다가 없다.

the truth can't be manufactured 진실은 만들어질 수 없다.

the truth doesn't take sides 진실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the truth isn't red or blue 진실은 진보나 보수가 아니다.

the truth is hard to accept 진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the truth pulls no punches 진실은 누구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the truth is powerful 진실은 강력하다.

the truth is under attack 진실은 공격받는다.

the truth is worth defending 진실은 지켜낼 가치가 있다.

the truth is requires taking a stand 진실은 태도를 명확하게 할 것을 요구한다.

the truth is more important now than ever 진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지금 중요하다.

 

by 카이로스 | 2017/07/17 15:07 | 일반 | 트랙백 | 덧글(0)

김기춘씨의 기대여명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란 말이 있듯이 한 개인이 얼마나 오래 살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집단적으로는(예를 들면 국가 단위) 생명표를 구해서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지는 알 수 있다. 생명표는 보건정책을 세우거나 국가 간 보건의료수준을 비교하는데 사용되고 있고 보험회사에서는 보험료를 정하는데도 활용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생명표를 범죄자의 형량을 정하는데 활용하려는 창의적(?)인 시도가 있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실행한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 재판에서 특검이 징역 7년을 구형하자 김기춘씨 변호인이 한국남자 평균수명이 80라며 “1-2년 남은 노인에게 무슨 형벌이 필요하냐며 선처를 호소했다고 한다.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시도인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변호인들이 평균수명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다. 평균수명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갓 태어난 신생아가 앞으로 살 것으로 예상되는 기대여명이다. 가장 최근 통계(2015)를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 신생아의 기대여명(평균수명)82.1년인데 남아는 79.0년이고 여아는 85.2년이다. 1939년생인 김기춘씨가 해당하는 78세 남자의 기대여명은 변호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남자의 평균수명 79세에서 현재 나이 78세를 뺀 1년이 아니고 사실은 9년이다.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생명표를 계산하는 방법을 이해해야 한다.

각 연령 별 기대여명은 연령별 사망률을 적용하여 대상 연령이 앞으로 경험할 총 생존년 수를 구한 다음 대상 연령의 숫자로 나눠줘 산출한다[박스 참조]. 각 연령 별 기대여명은 그 나이까지 생존한 사람을 대상으로 산출하기 때문에 평균수명으로 계산한 값보다는 항상 많게 된다. 예를 들어 현재 30세인 사람의 기대여명은 30세까지 안 죽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82.1-30세인 52.1년이 아니라 52.7(어차피 0세에서 30세까지는 많이 안 죽기 때문에 크게 차이는 안남)이고 그 간극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크게 돼서 82세인 사람의 기대여명은 82.1-82=0.1년이 아니라 무려 8.1년이나 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것은 2015년의 연령별 사망률을 적용해서 산출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사망률이 바뀌면 기대여명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70년에는 우리나라에서 0세의 기대여명이 62.3년이었고 47세의 기대여명은 24.9년이었다. 즉 올해 47세인 70년 개띠들은 자신들이 태어날 때는 47세가 되는 2017년도에는 수명이 25년 정도 남을 것으로 예상했어야 하지만 정작 2017년이 되고 보니 기대여명이 36세로 10년 이상 늘어나버렸다. 물론 이것은 지난 50년간 우리나라가 경제 성장을 하면서 사망률이 꾸준히 낮아진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최근에 저명 의학학술지인 란셋에 실린 논문에서는 2030년에는 지금보다 평균수명이 더 늘어나 한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평균수명이 긴 나라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즉 김기춘씨의 기대여명은 9년 플러스 알파인 것이다.

 

[box] 기대여명 구하는 법

2015년에 10만명의 신생아가 태어났다고 가정해보자. 2015년 우리나라에서는 0세에서 1세 사이 사망률이 인구 10만명당 272명이기 때문에 2015년에 태어난 아이들이 1년 후에는 99,728(10만명-272)이 남게 된다. 다시 1년 후에는 1세에서 2세 사망률이 인구 10만명당 24명이기 때문에 생존자는 99,704(99,728-99,728x0.00024)이 된다. 이런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면 100세에는 생존자가 2,293명이 남게 된다. 최종적으로는 모든 인간은 결국은 죽기 때문에 생존자가 0명이 될 것이다. 생존자 수를 이용하면 2015년에 태어난 10만명의 신생아가 경험하는 총 생존년 수를 구할 수 있는데 99,728+99,704+......+2,293+..=8,206,349년 이다. 총 생존년 수를 10만명으로 나눠준 값, 82.1년이 곧 2015년에 태어난 신생아의 기대여명이 된다. 현재 78세인 사람의 기대여명도 똑 같은 방식으로 78세 이후의 총 생존년 수를 구한 다음 78세 인구수로 나눠주면 된다.

 

by 카이로스 | 2017/07/12 23:38 | 평균수명 | 트랙백 | 덧글(0)

이반 일리히 부고 기사

이반 일리히 200212276세로 사망

 

-제도(-制度, anti-institutional) 작가인 이반 일리히는 1926924일 출생했고 200212276세로 사망했다.

학교가 학생에게 나쁘다고 믿은 과격한 사상가이지만 직접 행동하는 대신 사상가로 머물렀다.

이반 일리히는 20세기 후반의 가장 과격한 사상가 중 한명이었다. 1970년대에 멕시코에 있는 그의 씽크탱크에서 건강, 교육, 교통, 에너지 분야에서 과격하게 반-제도적(anti-institutional)이고 반-기술적(anti-technocratic)인 주장을 통해 전세계의 독자, 특히 젊은 독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1971년에 나온 학교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에서는 학교가 사람들을 무지로 이끈다고 주장했고, 1975년에 나온 의학의 한계(Limits to Medicine: Medical Nemesis: The Expropriation of Health)‘에서는 의료전문가들이 환자들의 안녕을 위험에 빠트린다고 주장하였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일리히는 사회학자와 정치 과학자이었는데; 1968년부터 뉴욕의 포드함대학(Fordham University)에서 파트타임 직위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종류든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매우 신중했다. 그는 역사가라는 명칭을 선택했고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은 시대는 중세 유럽이었고 당시 문헌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일리히는 자유, 평등, 형제애로 가득한 사회를 꿈꾸었지만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 전략가는 아니었고 점차로 행동 대신 사상 속으로 후퇴했다. 영국을 방문했을 때는 진짜 사회적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돌아다니기 보다는 교수들과 어울렸다.

이반 일리히는 비엔나(Vienna)에서 출생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 지주였고 어머니는 유태인(Sephardic Jew)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를 비엔나에서 키웠고 그는 나중에 14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는데 정작 그 자신은 모국어가 없다고 하였다. 나찌를 피해서 그의 가족은 오스트리아를 떠났고 그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학업을 마쳤다.

피렌체 대학에서 역사학과 결정학(crystallography)에 대해 연구했는데 심리학과 예술의 역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1943년에 로마로 가서 바티칸의 고위 교육기관인 그레고리안 대학(Gregorian University)에서 신부로 공부를 시작했다. 일리히는 짤스부르그(Salzburg) 대학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1951년 뉴욕에서 푸에르토리코인을 대상으로 하는 목사업무를 임명받아 열정적으로 임했다. 1956년에는 푸에르토리코의 카톨릭대학의 부총장으로 갔고 여기서 히스패닉 사회에 미국식(“Yankee")종교모델이 적용되는 것에 강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카톨릭 고위성직자와 반목하게 되는데 특히 주지사 선거에서 산아제한에 찬성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을 금지하는 주교를 공격하면서 충돌한 후 1960년 뉴욕으로 소환되었다. 195933세의 나이에 고위성직자(Monsignor)에 오르는데 당시에는 가장 젊은 고위성직자 중 한명이었다.

그는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을 찾기 위해 말은 타거나 도보로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베네주엘라의 카라카스에 이르는 5000 킬로미터 여행을 시작했다. 콜롬비아에서는 기아가 발생한 지역에서 선교목적으로 기독교인에게만 분유를 제공하는 행위를 중지시켰다. 그러나 이런 성급한 행동은 12명의 어린이를 죽게 만들었고 이 일은 그 후 수년 동안 그를 괴롭게 하였다.

1961년에 멕시코시에 문화교류센터(Intercultural Center for Documentation)를 설립해서 대중과 지도자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정보를 축적하고자 했다. 여기서는 라틴아메리카에 선교사로 갈 사람들을 위한 집중강좌를 제공했는데 이 강좌는 나중에 탈양키화(de Yankification)강좌로 불렸다. 또한 이 강좌는 나중에 라틴아메리카의 이슈와 핵심적인 서구의 사회문화적 문제에 대해 과격한 사상을 제공하는 곳으로 진화하였다. 강좌들은 문화적으로 제국주의 사고를 제거할 수 있는 집단 치료법에 집중하였다. 타임지에서는 그의 학생들에게 대하는 태도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소리 질렀고 강의를 했으며 함께 놀고 기도하고, 모욕을 주고 함께 술을 마셨다

카톨릭 사제들과 일반인들도 문화교류센터에 자주 왔는데 일리히는 규칙적으로 이 센터에 등록된 사람 중 상당수를 반미 활동에 적합하지 않다고 거부하는 바람에 교회와 더 깊은 갈등에 빠졌다. 멕시코에 있는 카톨릭의 우익 집단에서는 그를 아주 무서운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

19686월 그의 믿음과 견해가 이단에 해당하는 지를 심문 받기위해 로마로 소환되었다. 최종적으로 이단으로 판정되지는 않았지만 1969년 바티칸은 이 센터에 신부들이 참석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는 조사내용을 뉴욕타임즈에 누설했는데 그는 구아테말라 대주교 납치에 역할을 한 것으로 기소되었다. 두 달 후에 그는 자발적으로 사제직을 포기했으나 독신 서약은 유지하였다.

씽크탱크로서 센터의 역할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교육이었다. 이반 일리히의 가장 유명한 저서라고 할 수 있는 학교없는 사회1971년에 나왔는데 그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리게 된다. 서구의 교육제도가 관료주의, 성과주의, 전문성 숭배로 인해 붕괴하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학위, 자격증 기관을 통한 학습에 대해 반대의견을 냈다. 표준화된 교육구조의 비효율성이 그를 소름끼치게 했다. 그는 성인들은 12년의 교육과정 내용을 일년 또는 이년이면 충분히 습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성장을 멈춰라 'Tools for Conviviality(1973)'라는 저서에서 그는 타켓을 텔레비전(대화를 중단시키는)과 자동차(도시를 숨막히게 하는)을 확장시켰다. ‘Energy and Equity(1974)'에서는 자전거 타는 것을 주장했는데 정작 자신은 제트비행기로 여행을 했기 때문에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세계 여러나라에서 강연과 세미나를 요청받았고 그때마다 학문적 가정들을 뒤흔들기 위해 소크라테스 기법을 적용하였다.

의학의 한계(의학의 복수-건강을 뺏김)(Limits to Medicine" Medical Nemesis: The Expropriation of Health (1975)에서는 의료전문가들이 환자들에게 적극적 위협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의사들에 의해 야기된 질병이라는 의미인 의원성(iatrogenesis)라는 용어를 유행시켰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처방은 환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방법들을(의료분야에서 제공된) 이용해서 자신들을 직접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the Right to Useful Unemployment and its Professional Enemies(1975)에서는 전문가들이 지식을 독점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의 책들은 점차로 실제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덜 관심을 가지게 되고 지적 역사에 천착해서 대중적이 가지는 태도와 가정들에 대해 조사해나갔다. 이중에는 ABC: the alphabetisation of the Popular Mind(1988)In the Vineyard of the Text(1993) 등 중세 문학에 초점을 맞춘 저작들이다.

문화교류센터는 1976년에 문을 닫았고 그가 매우 인기가 높았던 독일의 대학에 새로운 출구를 만들었다. 그는 Kassel, Oldenburg, Marburg에서 방문교수직을 얻었다.

그의 전문성에 대한 공격은 실제 대중사회의 삶과 직접적 접촉을 하는데는 실패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날카로운 지적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말년의 생활은 멕시코시 외곽의 진흙 오두막에서 보냈는데 그에게 현대 산업도시 생활의 진짜 문제에 대한 통찰을 주었다.

그는 Penn State University의 방문 교수였고 Bremen에서 가르쳤고 암을 앓다가 숨졌다.

 

the Times, London 5 December 2002

by 카이로스 | 2017/07/01 23:36 | 이반 일리히 | 트랙백 | 덧글(0)

김어준의 안녕

사람 한명(대통령) 잘 뽑았더니 세상이 바뀌었다고들 한다. 물론 아직 바뀐 것은 대통령뿐이라는 한탄이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아질 것이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암담하기 그지없던 나라를 희망의 레일위에 올라놓는데 누가 가장 공을 많이 세웠을까? 촛불집회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 시민들의 일반의지가 가장 큰 동력이었고 국정 파탄의 끝을 보여줌으로서 전 국민의 80%를 하나로 묶어준 최순실씨가 일등 공신일 것이다. 그러나 87년 민주화운동의 결과로 민주정부가 아닌 노태우 정부가 탄생한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나쁜 정부에 대한 비토가 곧바로 좋은 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좋은 정부가 탄생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노력하는 세력이 있어야 국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 정부 탄생에 가장 공이 큰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 자신 일 것이다. 정치권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반문제인 정서를 뚫고 대통령 후보가 되고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전광석화처럼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는 것을 보면 그가 단지 운이 좋았던 착한 정치인이 아니라 누구보다 훌륭한 정치적 자질을 갖춘 정치인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 다음으로 문재인 정부의 탄생에 공이 큰 사람은 김어준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김어준이 진행하는 팟캐스트를 자주 듣다보니 그가 보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경향이 생기기 때문에(마치 음모론자들이 음모론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듯이) 편향된 판단일 가능성이 다분히 있긴 하다. 하지만 김어준이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특히 비판의 이론적, 실제적 근거 제시를 통해 국민들의 정치의식을 각성시키는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이명박 전대통령은 국가를 수익모델로 삼았고 박근혜 전대통령에게 정치는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제사라는 그의 분석은 그가 대단한 통찰력의 소유자임을 보여준다. 선거 국면에서는 소위 제3지대에 반문재인 세력이 결집하는 것을 저지하고 투개표 부정을 차단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노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선거는 다수의 후보가 경쟁하는 선거로 치러졌고 선거과정에서도 절차에 대한 별다른 잡음이 없었다. 촛불집회에서 문재인정부로 이어지는 길을 닦는데 크게 기여를 한 것이다.

요즘 김어준은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tbs 뉴스공장의 마무리 인사를 안녕으로 하고 있다. 공중파 방송에서 반말로 인사를 하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언론인인 손석희 앵커도 뉴스의 마지막에 내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존댓말로 인사를 한다.

나는 김어준의 반말 인사가 매우 의미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사실 그가 반말로 인사하는 이유를 직접 들은 적은 없고 아마도 청취자에게 친밀감을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추측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가 의도적으로 매일 반말로 인사한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의 가장 큰 화두가 소통인데 나는 우리 사회에서 소통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나이의식문화라고 생각한다. 유교의 장유유서 전통이 아직 남아있는 것인데 우리는 사람을 처음 만나면 가장 먼저 나이를 확인하고 나이에 맞춰 인간관계를 맺는다. 나이가 인간관계의 질서를 잡는 중요한 축인 것이다. 개인 간의 다툼이 폭발로 치닿게 되는 경우는 대게 나이에 따른 질서가 무시될 때, 즉 어린 사람이 나이든 사람에게 반말하는 경우이다. 조직 내에서는 나이의식문화에 위계질서가 얹어지면서 강한 상명하복문화가 형성되어 소통의 소자도 어려운 지경이 된다.

나이의식문화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상대방이 누구이던 개의치 않고 나눌 수 있는 인사말이 없다. 영어의 하이'나 스페인어의 올라와 같이 사람이면 누구나 간단히 눈을 맞추며 할 수 있는 인사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유사한 인사말인 안녕은 상대방과의 나이를 따져 안녕또는 안녕하세요두 가지 버전으로 세심하게 구별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러니 웬만하면 서로 인사를 생략하게 된다. ’하이같은 새로운 인사말을 만들어서 나이 불문하고 사용하자는 캠페인을 할 수도 있겠지만 예전에 국민들을 강제로 웃기려 했던 스마일 운동을 상기해보면 결과가 좋을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우리 인사말인 안녕을 방송을 포함한 여기저기서 쓰기 시작해서 사람들이 굳이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서로 안녕이라고 인사할 수 있게 된다면 소통이 좀 더 원활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김어준의 안녕을 주목하는 이유이다.       

by 카이로스 | 2017/06/29 17:18 | 일반 | 트랙백 | 덧글(1)

50대 부부의 남미 여행기-가장 인상적인 도시

남미에서 꼭 가봐야 할 도시를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쿠스코를 골라야 할 것이다. 3400미터 고산 지대에 있어 고산병으로 고생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장애요인이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어차피 남미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우유니 사막이나 티티카카 호수 등이 다 4000미터를 넘나들기 때문에 남미여행을 하려면 쿠스코 정도의 고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쿠스코의 가장 큰 매력은 잉카와 스페인, 두 문명의 융합에서 나온다. 물론 두 문명이고 평화적이고 수평적으로 섞인 것이 아니고 스페인인 잉카를 멸망시키고 자신의 문명을 이식한 것이지만 어차피 잉카인과 잉카의 도시에 이식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어떤 형태이던 두 문명이 융합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스페인 사람들이 쿠스코를 정복해서 첫 번째 한 일이 이곳의 신전이나 왕국을 다 허물고 그 돌들을 이용해 그 위에 성당을 짓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전체적인 도시의 모습은 중세 유럽도시를 연상시키지만 묘한 동양적 모습이 있다. 쿠스코 대성당에는 검은 예수가 있으며 이 곳에 걸려있는 최후의 만찬 식탁 위에는 이 지역 토착음식인 기니피그가 올라가 있다. 기독교 문명에 잉카의 색채가 덧 씌워져 있는 것이다.

쿠스코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아르마스 광장을 둘러싸고 수백 년 된 성당, 교회뿐 아니라 맥도널드, 스타벅스, 그리고 관광객을 유인하는 다양한 현지 식당들이 즐비하다(첫번째 사진, 가운데가 아르마스 광장). 수공예품을 파는 커다란 시장도 있다. 전반적으로 물가도 싸기 때문에 큰 부담없이 아무 곳이나 들어갈 수 있다. 알파카로 만든 스웨터(쿠나 제품이 좋음)라도 하나 사면 득템하는 것이다.

쿠스코는 그 유명한 마추피추, 계단식 경작지인 모라이, 산자락에 있는 염전 살리네라스 등 수많은 잉카유적지를 돌아볼 수 있는 허브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남미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도시인 것이다.

그런데 남미여행을 끝낸 후 가장 생각이 많이 나는 도시는 뜻밖에도 볼리비아의 수도인 라파즈이다.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이고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비자가 필요했던 나라이기도 하다.

라파즈는 여러 가지로 특이하게 생긴 도시이다. 먼저 지형적으로 보면 알티플라노(altiplano)라고 하는 안데스의 평평한 고원지대에 밑으로 크게 파인 협곡(마치 그랜드캐넌 같은)이 있는데 그 위에 만들어진 도시이다. 그래서 한 도시 내에 고도차가 무려 1000미터(바닥은 3000 미터 내외이고 고원지대는 4000 미터 내외)가 난다. 그런데 아랫동네는 부자들이 살고(그래봤자 보통의 남미 도시 같은 느낌) 윗동네는 가난한 사람들이 산다(제대로 포장도 안되어 있는 비가 오면 물 웅덩이가 곳곳에 생기는 아프리카 도시 같은 느낌). 사실은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두 개의 도시인 것이다. 그리고 아랫동네와 윗동네를 연결해주는 케이블카들이 대중교통 수단으로 운영되고 있다(두번째 사진). 그런데 케이블카가 너무 최신식이라 가난한 도시의 모습과 심하게 대비가 된다. 마치 식사는 컵라면으로 때우고 최고급 디저트를 먹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요금은 5(500원 정도)인데 딱 봐도 적자가 날 수밖에 없게 생겼다. 케이블카 문에는 모랄레스(남미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으로 장기 집권 중)의 얼굴이 새겨 있는데 아마도 케이블카가 대통령의 치적사업인 모양이다. 지형적으로 지하철을 만들기 어려운 도시의 특성 상 고육지책인 측면도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관광객 입장에서는 편하고 안전하게 라파즈의 전경(야경 포함해서)을 볼 수 있는 수단이다.

우리는 페루의 쿠스코에서 비행기를 타고 라파즈로 들어갔는데 쿠스코 공항에서 만난 한국인 아저씨가 라파즈에서는 음식 주의해야 하고(거리음식은 절대 먹으면 안 되고), 호텔 침대에는 벌레가 득실거리고, 소매치기 많고 등 온갖 부정적 사전 정보를 주었다. 우리도 각별히 주의를 한다고 했는데 어쩌다 실수로(티티카카 가는 버스를 예매하러 버스터미널을 갔는데 위치를 잘 못 알고) 윗동네로 가서 몇 시간을 헤매고 다녔다. 비 맞고 다니면서 안되는 스페인어로 버스터미널 어디 있냐고 물으면서 몇 시간을 헤맸고 나중에 숙소로 돌아가려고 택시를 잡을 때는 계속 승차거부를 당했다. 다섯 번쯤 승차거부를 당하고 난 후에 간신히 택시를 잡았는데 요금을 두 배쯤 요구한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관광객은 물론 현지인도 윗동네는 위험해서 잘 안 간다고 한다. 택시도 영업지역이 달라서 승차거부를 했고 불법(?)으로 우리를 태워준 택시는 그래서 왕복요금을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본의 아니게 가장 위험하다고 하는 윗동네까지 경험하고 느낀 소감은 사람 사는 곳은 비숫하다는 것이다. 길을 물어보면 누구나 친절하게 알려주려고 노력하고(말이 안통해서 별 도움이 안 되었지만) 적어도 대낮에 대로변에서 범죄를 당할 일은 거의 없다. 이곳에서 40년 동안 산 민박집 주인아저씨는 라파즈 사람들이 산사람들이라 기본적으로 순박하고 정직해서 크게 바가지 씌우는 일이 없다고 했고 실제로 내가 만나본 사람들(택시 기사, 상정 주인 등)도 그러했다.

한욱환(韓旭煥), 라파즈 샌프란시스코 성당에서 가이드로 일하고 있는 현지 청년인데 우리말로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일본인 관광객에게는 일본말, 영미권 관광객에게는 영어로 잠깐 안내를 하고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와 친절하게 성당 가이드를 해줬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영어, 캣츄아(현재어) 등을 자유롭게 구사하는데 한국에 특히 관심이 많아서 한국 이름까지 지었다고 한다.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 영미인에 앞서서 대우받다니 참 한국의 위상이 대단히 높아졌다는 것을 새삼느꼈다.

라파즈에서의 마지막 날 밤 한인민박에는 우유니투어 중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을 데려다 주기 위해 대사관 직원이 와 있었는데 집 앞에 세워둔 그의 토요타 차 엔진 부품을 도난당하는 사건이 있었다(차를 이용한 전문 도둑들이 본네트를 열고 차 부품을 훔쳐간 것이다.) 역시 라파즈는 위험한 도시인가 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여행 후에도 가끔 라파즈가 생각이 난다. 이번 남미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도시는 아무래도 라파즈인 것이다.  



by 카이로스 | 2017/06/16 16:36 | 여행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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