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은 치료될 수 있을까?-50년간의 황금시대


연구펠로우로 일한 3년 동안 연구한 내용을 매년 열리는 영국소화기학회(BSG, British Society of Gastroenterology)에서 발표하였다. 당시 영국은 소화기학 분야를 주도했고 영국소화기학회의 위상이 절정에 이른 때여서 전세계적으로 수천 명이 학회에 참석하였다. 논문이 채택되면 포스터발표 또는 구연발표를 하게 된다. 포스터발표는 구연발표에 비해 덜 영예롭게 생각하는데, 포스터를 붙여놓고 한두 시간정도 그 옆에 서서 우연히 그 옆을 지나면서 포스터 내용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질문에 답을 하면 된다. 때로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도 있어서 과학적 토론을 벌일 기회가 적다. 구연발표는 전혀 다르다. 구연 세션은 검투사 대결장 같아서 학회의 거장들이 겁먹은 발표자를 대상으로 자기가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이런 거장들은 마가렛대처 내각의 귀족적인 각료인 캐링톤경이나 더글라스 허드 같이 생겼다.) 잘난 체 하면서 발표자를 겁먹게 하는 이런 행동들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발표자가 거대한 야수에게 공격당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고 이런 상황은 발표자의 보스와 원한이 있는 경우에는 특히 더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의학연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졌고 젊은 연구자들을 단련시키는 기회로 여겨졌다. 기조강의는 기초과학자들이 하고 주요 청중은 임상의사들인데 그들은 그 주제에 별관심도 없고 학회에 몇 일 참석하고 난 뒤에는 환자를 치료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배우지도 못한 채 자신들의 병원에서 일상적인 진료업무에 복귀하게 된다.

1987년 에딘버러로 이주한 직후에 런던에서 영국소화기학회 창립 50주년 학회가 열렸다. 내가 제출한 논문이 포스터발표로 채택되어서 나도 런던대학의 커다란 홀에 걸려있는 내 포스터 앞에 서 있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포스터의 내용은 셀리악병에 대한 연구였는데 별 재미없는 결과들이었고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나의 예외는 경멸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는 나도 알만한 이 분야의 거장이었다. 이 학회는 1937년에 아서 허스트(Arthur Hurst)경에 의해 창립되었고 처음에는 소화기클럽으로 불렸다. 또 다른 학회의 원로인 존 알렉산더 윌리암스와 휴 바론은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학회는 의사와 신사들의 클럽으로 시작했다. 학회원들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을 회원으로 충원하면서 배타적인 기준을 유지했다. 근본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멤버쉽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소화기학뿐 아니라 미식도 즐겨서 학회 초기에는 좋은 음식과 와인에 대한 탐닉도 있었다. 신사로서 그들은 고상함을 지켰고 일반대중과 접촉을 피했고 그들의 발표 초록과 논문은 출간되지 않았다.

 

소설가인 에버린 워(Evelyn Waugh)도 만일 그가 소화기내과의사였다면 당시에는 저녁만찬에 어떤 정장을 입을지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하던 학회에 가입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양 없는 사람은 가입하지 못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이 클럽은 학회가 되어 외국에서 수련받은 사람과 의사가 아닌 연구자들을 포함해서 원하는 사람은 모두 가입을 시켰다. ‘영국소화기내과학회가 신사들의 클럽에서 과학자들의 모임인 학회가 되었다라고 바론과 윌리암스는 한탄을 하였다. 회원수는 40명에서 1500명으로 늘었다. 제출되는 논문이 너무 많아서 학회도 일년에 한 번에서 두 번으로 횟수를 늘렸다. 제약회사와 의료용품회사 들의 자신들의 제품을 홍보하는 전시회를 열면서 학회비용의 일부를 제공하였다.

1987년의 50주년 학회에는 수천 명의 참가했고 큰 전시회가 열렸다. 비록 거장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이 학회가 열린 때는 영국의학의 황금시대가 마감하는 때였다. 아서 허스트 경과 그의 친구들이 런던의 랭험호텔에서 만찬을 위해 모인 후 50년 동안 의학은 크게 변했고 영국은 이 혁명의 중심에 있었다. 프랜시스 애버리 존스 경은 거장 중의 거장이라고 수 있고 영국 소화기내과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1937년 첫 번째 학회에 참석했었고 198750주년 학회 때는 주빈으로 참석했다. 50년동안 프랜시스 경은 페니실린이 도입되고 효과적인 결핵약이 개발되고 신장 투석과 장기이식이 이뤄지고 내시경, CT MRI, 인공수정, 천연두의 박멸, DNA 이중나선구조 발견 등을 지켜보았다. 50주년 학회에 참석한 모든 참가자에게 기념책자(제약회사인 스미스,클라인,프렌치(Smith, Kline & French)가 지원해서 발간한)를 나눠줬는데 여기에 지난 50년간 가장 영향력있는 소화기내과 논문들이 실려있었다. 이 기념책자의 서론은 자연스럽게 이 시기에 활동한 프랜시스경이 썼다.

이 자료집에는 지난 50년간 의학연구가 영국에서 어떻게 전개되었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호기심이 가득한 개인에 의한 연구에서 기관과 산업의 활동으로의 변화. 1940년대와 1950년대의 많은 논문들은 단일저자-요즘에 단일저자에 의한 논문은 거의 볼 수 없고 10명 이상의 저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괴짜 개인들은 대부분 전업으로 환자를 보는 임상의였지 실험실의 연구자는 아니었다. 진정한 의미의 아마추어 연구자였다. 이 기념책자의 많은 논문들은 옛날의 단순했던 시대에 대한 향수들이 전해진다. 프란시스 애버리 존스 경이 단독저자로 1943년 영국의학회지(British Medical Journal)에 출간했던 논문에서는 당시의 출혈성 위궤양의 치료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당시의 주요 치료방법은 식이였다. 한시간 간격으로 두 번의 고기나 야채를 갈아만든 퓨레(puree)를 제공했다. 그 내용과 과정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데밀크티 한컵, 얇게 짜른 빵과 버터, 브램블 젤리, 스폰지케익’. 그의 환자들은 아버지 같은 의사의 손길 하에 틀림없이 아주 편안했을 것이다. 이 기념책자에는 프랜시스 경의 오랜 친구이자 센트럴미들섹스의 동료인 리처드 아서의 문카센 증후군(Mucchausen's syndrome)에 대한 논문도 있다. 아서는 일반의로서 우아하고 반박적인 에세이로 명성을 얻었다. 의학잡지에서 발견되는 찰진 산문은 작가이자, 의사이자 방송인인 마이클 오도넬에 의해 장식된 고딕양식‘decorated municipal gothic'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1950년대에는 심지어 란셋에서도 아서 스타일의 산문을 출간했다. 문카센 증후군은 가공의 질병이다. 관심을 받기 위한 꾀병으로 아셔는 가공의 독일 귀족의 이름에서 병명을 따왔다. ’유명한 바론 폰 문카센처럼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폭넓게 여행을 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극적이고 진실성이 없다. ‘나는 란셋의 독자들은 랍스가 쓴 문카센의 이상한 여행과 모험’Singular Travels, Campaigns and Adventure of Baron Muncausen'을 친숙하기 느낄 것이라는 그의 가정이 이상하게 와 닿았다.

 

영국의 과학은 혁신의 최첨단을 걷는다는 명성이 있었지만 실제적용과 상업적 개발이라는 지루한 과정에 돌입하는데 실패했다. 내시경의 역사가 그러하다. 하롤드 홉킨스(Harold Hopkins)은 런던 제국대학의 물리학자인데 플렉시블한 유리섬유를 통해 광학이미지를 전송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는 1951년의 성 조지병원의 의사인 휴 게인스보로우(Hugh Gainsborough)와 우연히 저녁 파티에서 만나 이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게인스보로우는 홉킨스가 줌렌즈를 개발한 광학분야의 전문가인 것을 알고 있었고 플렉시블한 내시경을 개발할 것을 제안했다. 그 당시에는 내시경이 딱딱한 기구였고 시야도 매우 좁았다. 딱딱했기 때문에 환자의 목구멍으로 들어갈 때 매우 위험했고(인두와 식도가 구멍날 수 있었다.) 엄청나게 불편했다. 홉킨스는 1954년 가장 명성이 높은 학술지인 네이쳐 지에 논문을 썼는데 그 내용이 BSG50주년 기념책자에 들어있다. 그는 섬유다발 또는 다른 투명물질로 구성된 단위를 기술했는데 섬유경(fiberscope)으로 부를만했다. 홉킨스는 산업계의 파트너의 관심을 끌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남아공의 소화기내과 의사인 바실 히르쇼비츠(Basil Hirschowitz)는 프란시스 애버리존스 경에게 수련을 받았는데 홉킨스의 아이디어를 받아서 미시건 대학의 다른 2명의 물리학자와 함께 거대한 미국회사(American Cystoscope Makers Inc, ACMI)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처음으로 상업적인 섬유광학내시경(fiberoptic endoscope)1960년에 개발하였다. 히르쇼비츠는 환자에게 시험하기 전에 내시경을 자신의 목구멍에 먼저 넣어 보았다. BSG에서는 내시경분야의 혁신상을 홉킨스의 이름으로 수여한다.

비록 영국이 내시경의 상업적 개발에서는 미국과 일본에 뒤졌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기술의 혁신적 적용을 시도했다. 1972년 성 토마스 병원의 고참 전공의인 피터코톤(Peter Cotton)은 담즙을 간에서 장으로 옮기는 담도에 내시경 관을 염료와 함께 넣어 X-ray로 담도를 촬영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여 란셋에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담석이나 암으로 인한 담도폐쇄가 흔했는데 통증과 황달을 일으켰다. 이 절차를 내시경적역행성췌담관조영술(ERCP, Endoscopic Retrograde Cholangio-Pancreatography)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일상적이 시술이 되었고 나도 수천 번씩 해본 시술이다. 담도폐쇄의 원인을 밝힐 수 있을 뿐아니라 담석을 제거하고 암으로 막힌 경우에는 스탠트를 삽입하여 폐쇄를 완화시킬수도 있다. ERCP가 개발되기 전에는 담도폐쇄환자는 대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코톤이 이 방법에 대해 처음으로 기술한 것은 아니다. 그는 1971년 일본으로 가서 소화기내과의사인 카우제이오고시(Kazuei Ogoshi)3주를 같이 보내면서 이 시술을 개발해서 돌아왔다. 그는 단독으로 ERCP를 영국에 보급했고 이 기술을 영국전역과 북미대륙에 전파할 수 있는 의사들을 교육시켰다. 영국에서 이 시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도제수업을 통해 전수되었기 때문에 스승을 추적해가면 결국 코톤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성 토마스 병원의 전문의로 임명되지 못했다. 잘난 척 하는 것에 대한 영국의사들의 불신이 분명히 작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나중에 미드섹스 병원에서 자리를 구했고 프랜시스 애버리 존스 경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가 나중에 쓴 빛의 끝에 있는 터넬 The Tunnel at the End of the Light’라는 비망록에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적었다. ‘애버리는 내가 미들섹스에 임용되었을 때 내게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 전형적인 런던의 프라이빗 클럽인 아테네움Athenaeum으로 나를 데려가서 점심을 사줬다. 포도주와 꿩고기를 먹으면서 개인진료에 대한 사실을 말해주었다.

위궤양은 50주년 기념책자의 1/4이상을 차지하는 주제였다. 20세기 초반에는 영국 남성의 10% 정도가 만성위궤양을 앓고 있었다. 이 병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흔히들 말했는데 리처드아서는 위궤양의 원인을 스트레스라고 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롱했다. ‘똑같은 논리로 손목시계가 궤양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손목시계 착용이 빅토리아 여왕시대 보다 엄청나게 늘었는데 위궤양도 똑 같이 늘었기 때문이다.’ 위궤양을 앓고 있는 많은 환자들은 대수술을 받게도는데 비엔나의 위대한 외과의사인 테오도빌로스(Theodor Billroth, 1829-94)는 위궤양에 대한 다양한 수술법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까지는 위궤양 수술이 외과의사의 중요업무를 차지했다. 어떤 수술은 너무 광범위하게 수술을 해서 치료가 오히려 질병보다 더 환자를 안 좋게 만들어서 소화기불구자‘gastric cripples'라는 집단이 생길 정도였는데 이들은 수술이후로 영구히 쇠약과 흡수장애로 고생을 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제약산업은 점차로 의학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스미스클라인프렌치(Smith, Kline & French)의 연구소의 제임스 블랙(James Black)1972년 네이처 지에 위장에 있는 히스타민 H2 수용체에 대해 발표했고 이 내용도 기념책자에 있다. 이 수용체는 위에서 위산분비를 조절한다. 블랙은 이 수용체를 차단해서 위산 분비를 줄이는 약물을 개발했다. 시메티딘(Smith, Kline & French에서는 타그메트)라는 상품명으로 출시했는데 위궤양에 대한 처음으로 개발된 효과적인 치료제이고 나중에 소위 블록버스터라 불리는 약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 성공은 나중에 개발되어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준 블록버스터 약물, -그래서 오늘날의 대형 제약회사를 탄생시킨- 모델 사례가 되었다. 시메티딘이 궤양을 아물게 하는 것은 맞지만 치료가 종료되면 예외없이 재발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이 약을 무한정 복용해야 한다. 시메티딘은 궤양 치료에 분명한 진전을 가져왔지만 완치시키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한계가 상업적 성공의 핵심요소였고 첫 번째 블로버스터 약물이 된 이유였다. 사람들은 몇 주 정도 먹는게 아니라 몇 년씩 먹어야 하기 때문에 판매량이 엄청났던 것이다. Smith, Kline & French는 엄청난 이익을 거뒀고 제임스 블랙 경은 198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프랜시스 애버리 존스 경은 소화기학 전문분야의 50년간의 위대한 진전을 축하하면서 다른 영역의 실패에 대해 한탄했다.

비록 지난 50년간 괄목할만한 진전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있다. 질병의 임상연구, 진단, 치료 부분은 거대한 진보를 이뤘지만 위궤양, 궤양성 대장염, 크론씨병 주요 질환의 원인은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다.”

프랜시스 경은 기념책자에 서론을 쓸 때 나이가 77세였기 때문에 최신의학논문을 다 보지 못한 것을 탓하기는 어렵다. 만일 최신 논문을 보았다면 198750주년 행사 5년 전부터 호주 퍼스의 병리학자인 로빈 와렌(Robin Warren)과 소화기내과수련의었던 배리 마샬(Barry Marshall)이 위궤양이 헬리코박터 파이로리라는 세균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는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는 것을 언급했을 것이다. 50주년 행사를 한지 두 달이 채 안되어 란셋에는 콜름 오모레이(Colm O'Morain)이 헬리코박터를 박멸하면 십이지장 궤양이 완치될 뿐아니라 시메티딘과는 달리 완치된 상태가 유지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마샬과 와렌도 일년 후에 란셋에 같은 결론을 발표했다. 일주일간 항생제를 조합해서 복용하면 위장을 잘라내는 수술을 필요로 했던 병을 완치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전세계의 위장관계학을 하는 사람들이 집단적인 인지부조화를 겪게 된 것은 너무 당연하다. 많은 전문가들은 처음에는 이 사실을 무시했지만 1990년 초에는 확신하게 되었다. 위궤양의 수술적 치료에 관련된 모든 임상 및 학술 연구의 기반은 그냥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외과의사들은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요크 카운티 병원의 외과의사였던 아서 헤드리 비식(Arthur Hedley Visick)1980년대 후반까지 살아있었더라면 심한 인지부조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는 1948년에 란셋에 그가 1936년부터 1947년까지 수술했던 500례의 수술방법을 정리한 근치적위절제술 측정 Measured Radical Gastrectomy'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수술에서는 만성위궤양 환자의 위를 1/2에서 2/3까지 절제하였다. 영국의 여러 지역과 외국에서 그가 수술하는 모습을 보기위해 요크로 방문하였다. 그는 1951년에 51세의 나이로 뇌출혈로 사망하였는데 외과 외래에서 쓰러졌다. 그가 수술한 500례 모두가 항생제 치료를 통해 완치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사망한 것이다. 헬리코박터 이야기는 용감한 호주의 이방인들이 획일적인 의료계를 접수한 단순한 서사는 아니다. 헬리코박터는 과거에 위산분비가 이전 세대의 집착이었던 것처럼 새로운 의료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헬리코박터 자체를 위한 학회와 학술지가 생겼다. 마샬과 와렌은 200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고 이 경로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위원회의 좌장이 되거나 커다란 연구비를 받았다. 위산분비라는 도그마를 받아들였던 일련의 학자들이 지금은 헬리코박터로 갈아탔다. 헬리코박터가 발견되었을 때 위궤양자체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었고 당시의 대부분의 위궤앙은 아스피린을 포함한 진통제 때문이지 헬리코박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헬리코박터에 감염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궤양이 발생하지 않는다. 위궤양이 없는 사람에서 헬리코박터를 박멸하는 도움이 되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인도 같은 개발도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헬리코박터에 감염되어 있지만 위궤양은 매우 드물다. 이런 사실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연구자들은 컨센서스 학회를 통해 공표되는 새로운 도그마인 헬리코박터라는 시류에 편승한다. 오늘 아침 PubMed를 검색해보니 헬리코박터에 관한 논문이 40,580건이 검색되었다. 나도 그 중 한편에 공저자이다. 다른 도시에 있는 연구소의 한 유망한 연구자가 셀리악병이 있는 환자들에서 헬리코박터의 유병률에 대한 논문을 쓰자고 제안을 해왔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는 헬리코박터를 혈액검사를 통해 진단할 수 있었고 나는 셀리악병 환자의 혈액시료 뱅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를 통해 확인할 흥미로운 가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도 새로운 것을 발견할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논문으로 발표되었는데 이 연구는 망치가진 사람(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는)의 과학적기회주의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헬리코박터와 셀리악병이 연결될 수 있는 그럴듯한 생물학적 이유가 없었고 임상적으로나 과학적으로 거의 관심이 없는 주제였지만 논문은 발표되었다.

영국소화기학회 50주년 기념책자에 있는 많은 논문들은 지금은 폐기된 생각들을 담고 있다. 의학연구는 수용된 의견에 이끌려지는 순응주의적 활동이다. 위산분비의 생리학에 대한 집단적인 집착은 직관에 반하는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헬리코박터가 등장하면서 갈피를 못잡고 있다. 마샬과 와렌이 헬리코박터를 발견하기 한참 전부터 위장에 세균이 살고 있다는 논문이 간헐적으로 발표가 되었지만 산도가 높은 위장에 세균이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로 무시되었다. 알란 버넷(Alan Bennett)은 그의 삼촌인 노리스에 대해 썼는데 그는 관절염이 양말의 길이를 잘라내는 간단한 방법으로 완치될 수 있다는 확신에 집착했다. 아마 의료계에서는 위궤양을 항생제를 이용해 치료할 수 있는 아이디어에 대해 노리스 삼촌의 관절염 치료만큼이나 생물학적 개연성이 없다고 했을 것이다. 이런 위대한 발견들은 계획되고 아낌없는 연구소의 연구비지원을 받는 연구의 결과라기 보다는 헬리코박터의 예에서 보듯이 열성적인 연구마인드가 있는 연구자들의 우연한 발견인 경우가 많다. 질병은 늘거나 줄어드는데 효과적인 치료법이 질병이 줄어들 때(위궤양이나 결핵의 경우에는)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의 흥미로운 혁신은 내일에는 학계를 질식시키는 컨센서스가 되고 한 때의 열광적인 혁신이 내일은 왕 중의 왕 오지만디아스(Ozymandias)처럼 잊혀진다. 1987년 이후로 거대과학이 주류를 차지하면서 50주년 기념책자에 나오는 논문들은 진기하고 순수한 것처럼 보인다.

지난 50년간 커다란 진전이 있었던 이유가 뭘까? 이차세계대전은 기술적 혁신을 유도했고 전후에 학문으로서 의학과 생의학적 연구가 특히 미국에서 극적으로 팽창하였다.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1945년 보고서인 과학: 중단없는 선구자(Science: the Endless Frontier)는 의학연구의 아젠다를 제시했다. MIT 학장이었던 부시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0년에 만든 국립국방연구위원회(National Defense Research Council)의 좌장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과학은 전쟁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평화 시에 과학발전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얻기를 원했다. 부시의 보고서는 기초연구의 우수성과 정부의 연구비지원을 강조하였다. 이 보고서는 미국 대학의 과학연구를 급격하게 팽창시켜서 1940년대에서 60년대까지 정부연구비 지원이 10배가 증가하였다. 그때까지 교육이 주요 업무이던 대학들이 과학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초과학에 대한 집중은 광범위하게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위대한 역학자이자 임상의인 알반 페인쉬타인(Alvan Feinstein) 1987년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연구의 방향성이 바뀌었다. 전 임상(preclinical) 과학연구가 임상과 유리되어 기초의과학연구로 전환하였는데 그 목표가 임상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영국에서는 NHS의 설립에 따라 학문적 의학의 커다란 확장이 있었고 하머스미스 병원의 왕립의학대학원RPMS(Royal Postgraduate Medical School)과 같은 연구중심 병원의 설립이 있었다. 1944년의 의학교육에 대한 보고서(Goodenough Report on Medical Education)는 모든 의학교가 의과대학이 되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 결과로 의대 내에 연구직이 크게 증가했고 임상교수직도 50개 이상 새로 생겼다. 전쟁 후에 RPMS는 영국 의학 연구의 의제를 설정했다. 전문의는 사설 진료를 할 수 없고 풀타임으로 임상 연구를 하게되었다. 당시는 임상연구가 관료제에 의해 구속받지는 않았다. 이것은 부정적 측면도 있었는데 많은 환자들은 연구에 남용되었는데 그들은 자신이 기니피그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순수히 연구목적으로 사전 인지나 동의없이 침습적이고 위험한 처치를 받았다. 존 맥마이클(John McMichael) 경은 전쟁 후 20년 동안 하머스미스 대학의 책임자였고 심장카데타와 간 생검을 선도적으로 시행했는데 지금은 두 개 모두 일상적인 처치가 되었다. 1950년대 초에 하머스미스의 전공의였던 알렉스 패톤(Alex Paton)은 그의 우려가 담긴 개인적 일지를 작성했다. “우리와 해머스미스의 모든 연구자들은 환자를 실험을 위해 사용하는데 이게 반드시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침상은 의학실험실의 부속실 이상이 아니다의사인 마우리스 팝워스(Maurice Pappworth)1967년 그의 책 인간 기니아피그라(Human Guinea Pigs)라는 책에서 비윤리적인 처치에 대해 써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심부전이 있는 나이 든 환자를 대상으로 맥마이클이 심도자 실험한 것에 대해 기술한 것을 보면 의사들이 때로는 가장 도움, 동정과 사려깊은 처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덜 아픈 사람이 아니라 가장 아픈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가운데 죽어가거나 나이든 사람이 우선 선택되었다‘. 세리아 셔록(Sheila Sherlock) 교수는(나중에 작위를 받는)는 하머스미스에서 맥마이클의 제자였고 나중에 왕립자유병원의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침상에서의 매너가 개발되지 않았고. 셔록의 BMJ 부고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환자를 위한 배려나 환자의 기분을 위한 것은 없었다.’ 팝워스는 1955년 랏셋에 편지를 보내 셔록의 비열한 실험을 언급하면서 영국의 수련기관이 임상의처럼 보이는 잔인한 생리학자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것을 고발하는 서한을 보냈는데 란셋은 게재를 거부하였다.

세리아 셔록의 문하생이고 나중에 라이벌이 되는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는 왕립대학병원 간 유닛을 만들었는데 당시 영국에서는 가장 큰 유닛이었다. 캠브리지의 아덴브로크 병원의 외과의사인 로이 칼린(Roy Calne)과 함께 일하면서 윌리암스는 영국에서 간이식 수술기법을 확립했다. 그들은 1969BMJ에 자신들의 초기 경험을 13명의 수술성적과 함께 기술하였다. 13명중 2명만이 4달까지 살아남았다. 4명은 수술 후 36시간 안에 죽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쯤에서 포기했을 텐데 그들은 계속 진행하였다. 그들은 이식된 장기의 거부 현상을 인체 면역을 억제하는 새로운 약물을 이용해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수술 전후 치료방법을 개선하였고 이식수술이 도움이 되는 질환들의 기준을 확립하면서 적당한 환자를 선별할 수 있었다. 간 이식 수술은 지금은 성공적이고 일상적인 치료법으로 여러 곳의 영국병원에서 시행되고 있고 거의 대부분의 환자는 살아남는다. 만일 BMJ가 오늘날 이와 같은 높은 사망률을 보이는 결과를 출판하였다면 여기 관여한 의사는 병원 매니저에 의해 제지를 받고 의학위원회(General Medical Council)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국의료계는 NHS의 설립에 반대했다. 앤우린 비번(Aneurin Bevan)은 병원의 전문의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관대한 제안을 해야했다. 비번은 전문의들이 사설로 개인진료를 하는 것을 허용했고 merit awards라는 경제적 유인책도 제공했다. 1948년부터 1970년 어느 때까지 전문의들은 전문적인 그리고 학문적인 자유를 만끽했는데 오늘날 온갖 규제에 시달리는 의사들은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피터 코톤은 1970년대 그의 동료들의 신사 같은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전문의 동료 중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사설진료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기사가 모는 자가용을 타고 미들섹스에 일주일에 두 번씩 가서 회진을 돌고 병동의 간호사들과 차를 마셨다.” 다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할리 가(Harley Street)에서 간호사들과 차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열광적인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집착을 추구했다. 코톤은 그의 선배동료인 피터볼(Peter Ball)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는 매주 이틀씩 병원에서 일했고 하루는 큐(Kew) 가든에서 난초의 분류법을 수정했고 하루는 사설진료소에서 하루는 런던동물원에서 뱀과 다양한 기생충에 대해 연구했다. 연구의 일부로 정기적으로 아프리카를 방문하여 어떤 기생충은 삼켜서 가져왔다.'

영국의학의 명성은 2차 대전 후 30년 동안 크게 높아졌다. 연구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치료법을 생산해냈다. -특히 대형수련병원의 전문의들은 거의 완벽한 전문적인 그리고 학문적인 자유를 즐겼다. 그들은 행정가에게나 일반대중에게 응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이상함과 과학적 열정은 그냥 용인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장려되었다. 피터 고톤이 언급했듯이 많은 사람들은 이런 자유를 오용하여 돈을 벌었지만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코톤이나 그의 동료인 피터 볼은 높은 야망을 추구했다. 그들 자신이 아직 수련의일 때 (고참 전공의) 고톤은 ERCP를 개발했다. 1980년대에서는 코톤은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전세계에서 ERCP를 배우기 위해 미들섹스병원의 그의 유닛으로 왔다. 하지만 그는 NHS에 환멸을 느겼다. 연간 정해진 예산으로 운영되는 병원은 그들의 젊은 스타 소화기내과 의사의 명성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그를 보기 위해 온 많은 외국의 수련의들에게 다음해는 25% 시술을 덜하겠다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마지막 일격은 병원에서 그에게 외국에서 수련 받으러 오는 것을(비록 무급이지만)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환자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1986년 코톤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듀크 대학의 내시경 책임자가 되어 남은 기간을 미국에서 보내게 된다.

의학계의 파워가 천천히 수련병원의 임상귀족- 프란시스 애버리 존스 경과 같은 의사-에서 실험실에 기반한 전문적인 연구자, 거대과학 브라만으로 이동하였다. 역사학자인 로이포터(Roy Porter)1997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 비록 한두 명의 이식 전문 외과의사가 명성을 얻고 있지만 진정한 파워는 노벨상을 수상한 연구자, 거대한 의과대학의 총장, 수십 억불 병원그룹의 이사회, 건강유지기구, 제약회사의 이사회 등이 가지고 있다.

위대한 수련병원은 매니저에 의해 운영되고 전문의는 비록 1980년 이후에 숫자가 크게 늘었지만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영향력이 없다. 의사들은 여전히 기사작위를 받지만 주로 학문적 브라만이나 위원회 사람들이 받는다. 나는 마지막으로 2014년 맨체스터에서 열린 영국소화기학회에 참석하였다. 임상귀족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열심히 일하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 소비에트의 스탁하노바이트(Stakhanovite) 같은 사기가 저하된 노동자의 집단이 있었고 그 중 누구도 아테네움에서 구운 꿩고기 요리와 적포도주로 점심을 먹지 못했다. 황금시대는 지나갔다

by 카이로스 | 2019/09/15 23:04 | 일반 | 트랙백 | 덧글(0)

의학은 치료될 수 있을까?-의학연구의 실상

의학연구의 실상- 점심시간 이후의 대약진

 

1980년대 이후로 의학연구는 국제적 비즈니스와 경제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의학산업 복합체의 지적인 동력이었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의학연구가 진실에 대한 갈구와 질병을 치유하고 생명을 구하고자하는 열정만이 동기가 되어 이타주의자들이 수행하는 가치있는 박애주의적 노력으로 비치고 있다. 많은 자선단체들은 이런 숭고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모금을 하고 심지어는 단체를 운영하는 것 자체가 비즈니스 영역이 되기도 한다. 의학연구는 좋은 일이고 더 많은 돈이 사용될수록 좋다는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가 있다. 이런 자선단체 돈을 기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의학연구의 대부분이 시간과 돈의 낭비라는 사실을 알면 놀랄 것이다. 의학연구가 돈과 시간이 낭비가 되는 이유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아주 많은 부분이 잘못된 방식으로 수행되고 있고 두 번째는 연구가 연구자 그리고 연구자와 연계된 상업적 이해관계에 도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연구 펠로우로 3년간 일하면서 아주 이상한 연구문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연구 펠로우는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의사가 몇 년간의 임상경험을 가지고 박사학위(MD 또는 PhD)를 받기 위해 임상을 벗어나 연구에 종사하는 프로그램이다. 내가 연구 펠로우를 한 이유는 의학분야에서 경력을 쌓고 싶어하는 대부분의 의사들과 동일하다. 1980년대에는 병원에 자리를 얻는데 경쟁이 심했다. 병원 전문의 자리는 누가 은퇴하거나 죽어야 생겼는데 공고가 날 때마다 20명 이상의 지원자가 몰렸다. 전공의 자리를 얻는 것도 비슷하게 경쟁적이어서 이력서에 연구경력이 있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지원자들은 임상 기술보다는 연구 경력에 의해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야망이 있는 의사들에게는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고 박사학위를 얻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삼년간 지역에 수련병원에서 일한 다음에 우연한 기회에 소화기내과의 전공의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이 분야에서 커리어를 추구하겠다는 열망 같은 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연히 제안을 받았을 뿐이었다. 소화기내과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아일랜드를 떠나야만 했다. 왜냐하면 1980년대에는 아일랜드에는 전문의 수련과정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문제를 지역의 전문의와 상의하였을 때 그는 단지 자신이 거기서 수련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영국의 에딘버러로 가서 수련을 받는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다. 그는 그곳의 소화기내과 교수에게 편지를 써 줬고 그 교수를 만났을 때 제약회사에서 지원을 받는 연구 펠로우 자리를 제안 받았다. 당시에는 제약산업에서는 특히 소화기내과 쪽 연구 펠로우 자리에 많은 돈을 지원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서 의학계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세금 혜택도 받았다. 교수는 돈을 지원하는 제약회사를 위해 작은 임상시험을 해야 하지만 그 일에 많은 시간을 쓸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내 연구의 주요 주제는 위장관의 면역체계 였다.

내가 연구 펠로우를 시작했을 때 교수가 내 연구의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교수의 제안은 좀 모호했다. 그는 몇 주 동안 도서관에서 관련 문헌을 읽고 기본적인 실험 테크닉을 익혀두라고 했다. 병원 도서관에서 대장 면역체계라는 모호한 분야에 대한 논문을 탐독했다. 두 명의 부끄럼을 많이 타는 이탈리아 출신 연구원들과 실험벤치를 공유했는데 그들은 소장에서 채취한 조직을 잘게 자르고 다양한 방법으로 염색하여 세포 종류별로 카운트 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카운트 방법은 염색한 조직을 현미경으로 보면서 특정 세포가 보일 때마다 숫자를 계수기로 세는 방법이었다. 많은 시간을 내부상피임파구(intra-epithelial lymphocyte)라고 불리는 세포 갯수를 세면서 보냈다. 한 친절한 기사가 항체 수준을 측정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실험실 스태프들은 연구 펠로우를 커리어나 쌓으려고 하는 아마추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나의 교수는 많은 연구 펠로우들이 세계 각처에서 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고 실험실의 휴게실에는 지도가 있었는데 펠로우들의 출신지 나라에 작은 국기가 표시되어 있었다.

내 봉급이 지불되었던 연구 과제는 셀리악병에 대한 신약 임상시험이었다. 셀리악병은 음식에서 글루텐을 제거하면 효과적으로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이 1940년대 후반부터 알려져 있었다. 음식을 조절하면 되는 병에 치료약을 개발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 생각은 여전히 지지되고 있다. 어떤 환자들은 식이요법을 엄격하게 하기 어렵다는 좀 이상한 이유로 말이다. 이 임상시험은 이탈리아 펠로우가 시작했고 내가 넘겨받아 더 많은 환자들은 모집했다. 환자들은 임상시험 시작 전에 소장에서 조직검사를 받았고 보통식사를 하면서 이 약을 세 달 동안 먹도록 했다. 그런 후에 호전이 있는 지를 보기 위해 다시 조직검사를 했다. (셀리악병은 식이조절을 하면 소장 조직검사에서 호전이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 임상시험은 윤리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이미 병의 원인이 알려져 있고 치료방법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왜 이 약이 치료제로 사용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생물학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상한대로 이 임상시험에서는 약물의 이득이 확인되지 않았다. 임상 시험이 끝난 직후에 환자 한명이 셀리악병과 관련된 희귀한 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이 약이 암을 직접 유발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환자에게 임상시험 기간 동안 효과가 없는 약을 복용하면서 글루텐을 계속 먹도록 했다는 사실은 이 환자에게 분명이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당연히 이 임상시험의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고 싶었다. 제약회사의 지원을 받은 것이라 그 결과를 학술지에 발표할 때는 사전에 제약회사에 보여주도록 계약이 되어 있었다. 제약회사에서는 이 약이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당연히 이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데 반대했다. 사실 제약회사가 걱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학술지에서 검토자에게 검토를 의뢰하는 절차도 거치지 않고 바로 출판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유의미한 결과가 없는 임상시험 논문은 출판이 잘 안되기 때문에 생기는 출판바이어스를 처음 경험한 사례였다.

교수에게 특정 연구프로젝트에 참여시켜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장 조직에서 이미지 분석이라고 불리는 컴퓨터화된 방법을 이용하여 세포의 숫자를 계산하는 기술을 개발하는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다. 우리는 연구가설에 대해서는 한 번도 논의를 하지 않았다. 주 관심사는 데이터를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교수는 나와 짐이라고 불리는 기사 한명이 다른 부서에 이 일을 하도록 주선하였다. 짐과 나는 별 성과 없이 이 이미지분석기 작업을 하였다. 우리가 얻었던 유일한 영상은 찌직거리는 텔레비전 영상같은 이미지였다. 몇 주를 황당하게 보낸 후에 우리는 이 방법으로는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미지분석기 작업이 별 성과가 없었다는 것을 교수에게 보고했다. 유일한 선택은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교수는 1970년대에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연구를 명성을 얻었는데 관심영역을 인간에 대한 연구를 옮기고 싶어했다. ‘전체 장 세척이라고 불리는 동물실험에서 사용하던 기법을 인간에게 적용하는데 관심이 많았다. 나는 이 방법을 개발하는 일을 맡았는데 자원자에게 댓가를 지불하고 대장내시경 준비를 위해 사용하는 관장액인 생리식역수(GoLytely)4리터를 마시게 하였다. 자원자가 라거맥주 색깔의 용액을 배설하면 이 세척액을 모아서 여과시키고 필터링하고 이 세척액 속의 항체를 보전하기위한 보존화학물질을 첨가하였다. 나는 병원 화장실을 돌아다니며 설사로 가득 찬 철제 용변기를 쳐다보면서 필터링을 시작할 단계인지를 주의깊에 관찰하였다. 사람은 모든 일에 더 적응할 수 있다. 실험에 자원한 사람들은 동물실험실의 기사들로 항상 돈이 부족했다. 좀 냉소적이던 한 동료는 실험쥐를 충분한 숫자가 죽으면 박사학위가 만들어지는 동물로 정의하기도 했다. 동물실험실에는 불쌍한 실험쥐와 원숭이들도 있었고 염소도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나는 이 불쌍한 동물을 죽이는 일은 피하려고 했었는데 하루는 이탈리안 펠로우가 능숙하게 쥐의 꼬리를 잡고 흔들어 머리를 실험실 모서리에 부딪혀서 쥐를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

망치를 가진 사람 눈에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속담은 많은 의학연구, 특히 내가 한 연구에도 적용된다. 나는 곧 전체 장 세척에 참여할 진짜 환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어차피 대장내시경 검사를 위해 사전 조치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환자들도 일부 있었다. 이 이 방법을 이용해서 모든 항원에 대한 항체를 측정하여 그 결과를 모두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이 기법(이것을 기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면)을 크론병을 물론 강직성척추염이라고 불리는 관절에 이르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병에 적용하였다. 다른 펠로우는 침-내가 한일에 비해서는 눈과 코에 덜 역겨운-을 모아서 역시 모든 가능한 비교를 하였다. 질문 또는 가설로부터 연구를 시작하는 대신 우리는 기법으로부터 시작해서 가능한 한 많은 데이터를 만들었다. 나는 여러 종류의 환자에서 전체 장 세척액‘, 장 쥬스, , 혈액을 모으면서 2년을 보냈다. 그 다음 2년은 여러 편의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 논문도 썼다. 약간의 성취에 우쭐해져서 어리석게도 연구 쪽으로 커리어를 쌓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좀 더 높은 자리에 임용되기도 했다. 이것은 실수였는데 나는 곧 학술활동에 환멸을 느꼈다. 그 자리에서 18개월 가량을 보낸 후에 그만 두고 요크셔의 선임 전공의 자리를 이동했다. 나의 연구 경력은 창피하게 소멸했지만 얻기 힘든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진정한 과학자로서의 호기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통상적이 루트를 따라 의학계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이 부족했고, 냉소적이었지만 충분히 냉소적인 것은 아니어서 란셋에 논문을 실은 것과 박사학위를 자랑스러워했는데 그것으로 충분했고 다시 임상으로 돌아오면서 안심이 되었다. 내가 연구 펠로우로 보낸 3년은 순전히 공리주의적으로만 보면 잘 보낸 기간이다. 나는 내가 얻기로 마음먹은 것을 모두 성취했지만 그 분야는 계산적이 신이나지 않는 비즈니스였고 내가 생산한 것 중에 지속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비록 과학지식에 어떤 의미있는 기여도 못했지만 의학연구가 어떻게 수행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배웠다. 과학적 호기심에 영감을 받는 과학자는 거의 없었고 내가 만남 고참 연구자들은 승진, 연구비, 논문, 수상 같은 동기부여가 되었다. 의학연구실험실은 일종의 공장으로 데이터라는 원료를 생산해냈다. 이런 데이터로부터 여러 가지가 만들어졌는데 학회 발표, 학술지에 논문 발표, 박사 학위, 연구비 신청, 심지어는 마일리지까지. 데이터가 산출된 체액을 제공하는 환자는 말할 것도 없고 병실에서 벌어지는 일도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학문 계층에서 최상위 계층인 브라만에 해당하는 교수 또는 부서의 장, 학장은 학문적 요소가 거의 없는 부서에 대한 임명권까지 가졌다. 그들은 위원회에 참여하여 서로에게 연구비를 나눠주었다. 그들의 임상적 역할은 명목상만 있었다. 당시에 NHS의 수련병원은 주로는 경험 많은 주니어 닥터에 의해 돌아갔다. 주로 외과분야에서는 거의 40세에 이르러서야 전문의로 임명되었다. 고참 전공의들은 전문의보다 임상적으로 더 능력이 있었고 기민했다. 특히 학문분야에서는. 내가 아는 한 학문 전문의는 일주일에 한번 회진을 돌았는데 그의 처방은 너무 이상하고 위험해고 틀린 것이어서 병동 간호사와 고참 전공의는 전문의가 회진돌 수 있게 환자들에게 한번 안내를 한 다음 진짜 회진을 다시 돌았다. 다른 전문의는 외관의였는데 수술장에서 너무 위험하게 수술을 해서 주로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직으로 승진했는데 그 이유가 그를 수술장에서 멀찌감치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고참 전공의에게 의존함으로서 브라만들에게는 자유롭게 연구라는 게임에 몰두할 수 있게 해줬고 그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주로 충원하여 이 체계 자체지속적인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연구 펠로우들과 어울렸는데 우리는 주로 의사들의 식당에서 점심시간에 만났다. 금요일에는 선술집에서 만났다. 우리는 걱정스럽게 학회에 발표할 내용의 진행상황과 게재 승인을 받은 논문을 비교하였다. 그들 모두는 지금은 크던 작던 명성이 있는 교수들이다. 두 명은 의과대학의 학장이다. 나는 그들과 한번도 과학에 대한 논의한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경력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유전학은 의학 연구 분야에 들어왔는데 연구 펠로우들은 유전학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다. 일찍 유전학 연구를 시작한 사람들은 많은 연구비를 받았다. 내가 함께 일했던 존경할만하고 저명한 교수들은 임상경험은 거의 없는 유전학 연구자로 대체되었다. 학문적 의학 분야로의 문화적 전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의과대학의 교수는 일종의 평등한 자들 중의 첫 번째’(first among equals)로 주로 남성이고 임상가로서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고 의대학생들을 교육할 때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기대되었고 여유가 되면 연구도 수행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쯤에는 이 모델이 폐기되었다. 고참 연구자들의 역할을 실험실을 위해 연구비를 따오는 것이 되었다. 그들은 주로 분자생물학자로서 유전학 또는 다른 세포학 사이토카인 면역 등의 전문가였다. 그들은 교육은 젊은 연구자에게 위임하고 임상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런 새로운 부류의 교수들은 자랑스럽게 모든 임상업무를 서약했고 경력은 기사작위를 받으면서 정점에 올랐다. 근거기반의학의 설립자인 데이비드 사켓(David Sacket)2004년 영국의학회지(BMJ)에 기초의학자들은 연구비주는 기관을 장악해서 환자들에 봉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개인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것에 더 가치를 주는 연구정책을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모든 고참 의학자들의 자리는 이런 새로운 형태의 의사들에게 돌아갔다. 진료하는 임상의와 연구자의 간극은 더 크게 벌어졌다.

나는 내가 연구자로 있었던 때를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외부인의 시각을 가지고 내부에 접근할 수 있었다. 때로는 하는 일과 정서적으로 너무 유리되어 마치 의학연구 행태에 대한 현장조사를 하고 있는 인류학자가 된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해리 콜린스라는 사회학자는 전문가에 대한 전문가로서 중력파 물리학자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수행했는데 그는 물리학자들을 좋아했다. “그들은 아주 이상적인 학자였다. 그들은 약간 미친 것 같은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는데 경제적 보상 없이 순전히 학문적 이유만으로 그 일을 수행했다.” 콜린스가 관찰한 물리학자들은 고고한 과학의 이상-정직, 진실성, 일반화, 자신의 생각을 기꺼이 다른 사람이 조사할 수 있게 제공, 이해관계 없음 등-을 체화시킨 것이다. 나는 의학연구를 지켜보면서 그런 이상주의를 본 적이 없다.

연구 펠로우가 끝나갈 무렵 나는 트루먼쇼 같은 이상한 경험을 했다. 나는 점심시간 이후 대약진(The Greatest Breakthrough since Lunchtime)’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북페어에서 우연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의사인 저자는 콜린 더글라스라는 필명으로 책을 썼다. 이 책은 1977년 처음 출간되었다. 먼지 붙은 장의 안쪽 면은 이 얇은 책의 1970년 음탕한 분위기를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보여주는데, 토프리스로 의사의 가운을 열어재끼는 안경 낀 여성의 사진.

책 표지에는 게으름, 음탕함, 취함, 지루함, 간음 그리고 의학연구에 대한 소설이라고 광고한다. 이 책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캠벨은 에딘버러의 수련병원에서 일하는 젊은 의사로서 아마도 작가 자신이 모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에서는 에딘버러에서 일하거나 수련받은 의사에게만 관심이 있을 법한 소설이지만 나는 호기심에서 이 책을 샀다. 그 책을 읽으면서 더글라스가 기술하는 장면이 익숙하다는 것을 느꼈다. 주인공은 병원 수련을 마친 후에 연구 펠로우를 하게 되는데 제약회사에 지원을 받고 피비라는 학술적 의사의 지도를 받는다. 피비로부터 내가 받은 것과 똑 같은 격려를 받는다. ‘그녀는 대장 점막 실험의 기본 방법을 제안하면서 실험이 진행될 실험실에 대해 말한다. 그는 하루 이틀 실험을 익히면서 그 분야에 대해 첫 일주동안 공부를 하게된다. 책에 나오는 많은 고참 의사들은 나같은 아웃사이더도 누군지 알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캠벨은 분변 비타민에 대해 일하게 되는데 나의 전체 장 세척액 항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더그라스는 이 일을 지루함을 잘 표현했다. 캠벨은 설명들은 대로 이 분야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의학도서관에 간다. 작은 규모의 성당이 비슷한 시간에 그러하듯이 도서관에도 사람이 별로 없고 지역사회에서 가장 신실하거나 아니면 가장 게으른 사람들만 있었다. 이 책에는 강박처럼 쥐의 프로스타글란딘에 대한 논문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여자도 나온다.

캠벨은 자신의 시간 대부분을 다음 성적 정복대상에 대해 계획하면서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더글라스는 캠벨이 간호사와 마주친 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그들은 서로 좋아했고 성관계는 대단했다.) 그리고 실험실 기사(크리스트 나는 그게 필요해) 그는 빠르게 연구자의 환상에서 벗어났다. 그의 보스인 피비는 분노한 사이코패스이고 그의 윗 전공의이는 호사가이자 사기꾼 이었다. 그는 그의 보스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있는 지를 동료들과 함께 생각하였다.

 

우리 모두는 그녀가 교수가 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어. 사람들과 환자들 모두‘. 캠벨은 사악한 삼촌처럼 웃으면서 어린이들, 이게 바로 의학연구의 뜻이지

그의 동료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당신은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거죠? 90년대에는 교수가 되고 싶은거죠?’

그렇지 않아. 내가 충분히 비열하지 않거나 아니면 충분히 관심이 있지는 않아서 그렇게 결정할 수 없어

 

이 책은 다운증후군에 걸린 여자 아이가 죽으면서 끝난다. 그녀는 동의도 없이 교수와 선임 전공의에 의해 위궤양치료약물의 임상시험 대상이 되었고 이 약물에 의한 골수부전의 결과로 사망하였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내 월급을 지불했던 어리석고 쓸모없는 약물 시험 대상이 된 후 죽은 셀리악병 환자가 떠올랐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캠벨은 연구 펠로우 직을 그만두고 임상으로 돌아간다.

어떻게 10년 전에 출간된 가벼운 잡동사니 책이 정확하게 나의 연구 펠로우 생활을 그려낼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병원의사의 고백과 일리치 식의 의학연구에 대한 비판의 이상한 조합인 이 소설은 내가 힘들게 얻은 교훈의 일부에 대한 결정체이다. 의학연구는 냉소적인 출세주의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게임이다. 데이터가 아이디어보다 더 중요하고 교수직이 환자보다 더 중요하다.

by 카이로스 | 2019/08/31 23:13 | 의학 | 트랙백 | 덧글(0)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딸의 논문관련 논란에 대해

청문회가 후보자의 자질 검증보다는 여야 정쟁의 장이 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 조국 후보의 청문회는 가히 전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다툼이 치열하다. 후보자와 가족에 대한 융단폭격이 이루어지고 있고  파편도 사방으로 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나와 무관하지 않은 단국대학교이다. 조국 후보자 딸이 단국대의과학 연구소에서 인턴으로 2주간 있으면서 논문의 제1저자가 된 것이 크게 논란이 되고 있다. 오늘 아침 광역버스 안에서 우연히 본 모 중앙일간지의 일면 헤드라인은 조국 딸 논문 고교생 신분 뺐다--의협 위조”’인데 이것을 보고는 뭔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제목이 너무 악의적이기 때문이다.

주요 연구부정행위로는 존재하지도 않은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날조, 데이터 수치를 가설에 부합하게 고치는 위조, 그리고 잘 알려진 표절이 있다. 표절의 경우는 판단하기가 애매한 부분이 있고 인용처리 누락 같은 실수인 부분도 있지만 날조와 위조는 연구자라면 절대 범해서는 안 되는 절대악 같은 것이다. 이번 논란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위조라는 단어를 인용부호를 써서 헤드라인에 올린 것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논란은 크게 고등학생이 2주간 연구에 참여하고 제1저자가 되는 것인 정당한가와 소속을 재학하고 있던 고등학교가 아니라 단국대의과학 연구소로 한 것이 문제가 없는지, 이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저자부분은 원칙은 명확한데 실제 적용하는 과정에서는 애매한 부분이 많고 그래서 연구자 간의 분쟁의 소지가 되기도 한다. 원칙은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으로 1)연구의 개념과 설계에 참여, 2)데이터 수집과 해석을 담당, 3)원고작성참여, 4)발표최종본을 승인하고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2주간 인턴으로 참가한 고등학생이 위의 저자 기준을 완벽하게 충족시켰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고도 저자가 되는 것은 현실에서 너무 비일비재하다. 만일 누가 이 부분을 문제 삼는다면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라는 성경말씀을 해주고 싶다. 실험에도 참가하고 원고작성에도 참여했다면 저자로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저자 중에 가장 중요한(또는 영예로운) 저자는 책임저자와 제1저자인데 책임저자는 연구에 가장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논문관련해서 소통도 담당하기 때문에 교신저자로도 불린다. 1저자는 저자 중에 제일먼저 이름이 나오는 저자로 논문 작성을 주도한 사람이 된다. 보통의 경우라면 젊은 연구자 중에 해당 연구를 주도하고 논문작성도 주로 한 사람이 제1저자, 교수가 책임저자가 되고 나머지 저자들이 기여도에 따라 적당한 순서로 배치가 된다.

고등학생이 제1저자가 될 정도로 기여를 할 수 있었냐는 문제제기는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저자의 순서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책임저자와 제1저자를 동시에 하는 것은 일단 모양새가 별로 좋지 않고(욕심쟁이처럼 보이고) 실익도 없다. 공동연구자 중에 그나마 기여를 많이 한 사람을 제1저자(1저자의 기준을 완벽하게 충족시켰느냐는 별개로)로 삼게 되는데 그 판단은 교수의 몫이 된다. 만일 다른 공동저자 중에 자신이 제1저자를 차지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교수가 부당하게 고등학생을 제1저자로 했다고 문제 제기를 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교수의 판단을 존중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논문에 저자의 소속을 기재하는 이유는 연락처 확보와 연구를 수행한 곳이 어디인지를 알려는 목적이 있을 것 같은데, 소속이 논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논문 평가는 블라인드로 하는 것이 원칙이라서 소속과 논문 게재 여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학술지 중에 소속을 쓰는 기준을 제시하는 곳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따라서 논문 투고 시에 소속을 입증하는 서류를 요청하지도 않는다.

그냥 현재 근무하는 곳을 쓰면 되는데 중간에 소속이 바뀌는 경우에는 고민이 될 수 있다. 해당 연구가 주로 이루어진 곳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별한 규정이 있지는 않기 때문에 본인이 편리한대로 적으면 된다. 예를 들어 만일 이전 직장에서 연구비를 받아서 연구를 수행했기 때문에 연구결과 제출의 의무가 있다면 이전 직장으로, 새로운 직장에 기여하고 싶으면 새로운 직장을 소속으로 쓰면 되고 이것가지고 누가 문제 삼는 사람은 없다.

이번 경우에도 연구가 이루어진 곳이 단국대의과학 연구소이기 때문에 소속을 단국대의과학 연구소로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논란을 예상했다면 고등학생 신분으로 단국대의과학 연구소의 인턴연구원으로 참여했다고 추가로 기재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고등학교 이름은 쓸 수도 있고 안 쓸 수도 있겠지만 연구기관도 아닌 고등학교 이름을 굳이 번거롭게 쓸 필요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 나온 또 다른 기사 중에는 논문 정보 등록 때 박사로 기재했다면서 대학의 검증을 통과하기 위해 허위기재했다는 기사도 있는데 이것도 내용을 알고 보면 황당한 추측이라고 할 수 있다. 단국대에서는 교수들이 논문을 발표하면 학교의 연구업적관리시스템에 올리는데(올리는 것을 잊어먹기도 하고) 이 정보를 이용하여 교수들의 업적평가를 하게 된다. 이때 공동연구자의 소속, 직급, 학위 등도 같이 기록하게 되는데 아마 이곳에 그 학생의 학력이 박사로 기재가 된 모양이다. 그런데 이 시스템은 뭘 검증 하는 곳이 아니라 교수가 올린 것을 확인해서 집계를 하는 곳이다. 단국대 교원이 쓴 논문을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공저자가 누군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이다. 단순 실수이거나 아니면 고졸이하를 체크하는 난이 없어서 (지금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많이 되어서 미성년자는 따로 등록을 하도록 되어 있지만 말이다.) 그냥 박사로 체크했거나 일터인데 어쨌거나 이번 논란과는 결과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조국 후보 청문회 정국의 가장 큰 피해자는 딸일 것이다. 본인이야 아무리 고초를 겪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결과이지만 그 딸이야 아직 사회경력을 시작하기도 전인데 큰 오명(?)을 입게 되었으니 말이다. 부디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고등학생 신분으로 의학논문의 제1저자가 되었던 영예로운 경험을 되살려 앞으로 훌륭한 의학연구자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by 카이로스 | 2019/08/22 18:24 | 일반 | 트랙백 | 덧글(12)

의학은 치료될 수 있을까?-사람들이 너무 오래 산다.(제1장)


우리는 우리의 건강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인류 역사에 경험하지 못한 사치이다. 나의 어머니는 1932년 아일랜드 웨스트코크 지방의 시골마을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가 10살 때 매우 아팠는데 당시에는 의사 왕진이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그녀의 부모는 너무 걱정이 되어 의사를 불렀다. 의사는 10마일을 운전해서 왔는데 도착할 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 의사는 소녀를 진찰한 후에 부모에게 폐렴이 걸렸다고 얘기하면서 설파피리딘(sulfapyridine)이라는 항생제를 처방하였다. 설파피리딘은 2년 전에 처음 개발되었는데 제조사(May & Baker)의 이름을 따서 흔히 ‘M&B'라 불렸다. 이 약은 이차대전 때 많이 사용되었지만 페니실린이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사라졌다. 이 의사는 그녀의 부모에게 절대 물을 주지 말라고 했는데 왜 그랬는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부모가 의사의 충고를 거슬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의 어머니는 폐렴과 심한 갈증이라는 두 개의 고통을 견뎌내야만 했다. 나의 어머니를 구한 것은 언니 마가렛(Margaret)이었는데 자기가 당번인 밤에 우물에 가서 물을 떠서 먹인 것이다. 언니의 금지된 봉사이던 ’M&B'의 약효거나 아니면 둘 다 모두 작용해서 어머니는 살아남았다.

오빠인 빌리(Billy)는 운이 안 좋았다. 17살에 기숙학교에 있을 때 병에 걸렸는데 체중이 빠지고 등에 통증이 있었다. 집으로 보내졌고 결국 척추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빌리는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그 기숙학교에서 수백 명의 다른 소년들과 밀접하게 생활했기 때문에 그 중에 여러 명이 결핵에 걸렸을 것이다. 음식은 감옥처럼 배급제로 제공되었고 전쟁 때는 특히 사정이 안 좋았기 때문에 이들은 만성적으로 영양결핍 상태였고 감염에 더 취약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결핵에 효과적인 약이 없었다. 빌리의 부모는 빌리를 병원에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의사가 빌리의 병이 많이 진행되어 치료불가능하고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집에서 아들을 간호를 했는데 동네 아줌마들이 집안일과 애들 돌보는 일을 도와주었다. 결국 빌리는 1946년에 1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몇 년 전에 수녀학교에 들어갔던 그의 누이 줄리아(Julia)는 수녀원을 나와 빌리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9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결핵은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걸쳐 아일랜드에서는 재난이었다. 극작가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의 아버지인 윌리암 와일드(William Wilde)는 인구통계관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일랜드 전체에서 1831년에서 1841년 사이에 전체 사망자의 11.4%(전체 1,187,374명의 사망자 중 135,590)가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추산했다. 결핵은 가난과 영양실조와 관련이 있어서 결핵환자는 사회적 낙인이 찍혔는데 쇠락이나 연약함 등의 비유로 사용되기도 했다. 낙인효과가 너무 커서 많은 환자들은 가족에 의해 숨겨지기도 했다. 빌리가 사망한 지 2년 후에 노엘 브라운이라는 젊은 의사가 아일랜드 연합정부와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결핵에 대한 집단 검진과 함께 BCG 예방접종을 실시하였다. 브라운의 프로그램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둬서 결핵 사망률은 1947년 인구 10만 명 당 123명에서 1951년에는 73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는 몇 개의 결핵요양병원을 지었다. 결핵요양원은 유럽대륙에서는 19세기 중반 이후 잘 운영이 되어 토마스 만(Thoma Mann)의 마의 산(Magic Mountain)이라는 소설의 무대도 스위스의 결핵요양원이었다. 요양원에서는 휴식을 제공하고 맑은 공기와 햇볕, 그리고 대구간유 같은 영양보충제를 제공하였다. 이런 치료에 의해 일부는 회복되었지만 대부분은 사망하였다. 폐결핵 환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외과적 시술도 이루어졌는데 이중에는 기흉을 만들어 폐를 짜부라트림으로서 폐를 쉬게하거나 횡경막신경을 손상시켜 마비시킴으로서 폐를 쉬게하거나 아니면 감염된 폐의 일부를 절제하기도 했다. 이러한 치료들은 효과가 의심스러웠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치료를 받고 살아남은 노인들도 본 적이 있다.

빌리가 사망한 즈음에 미국에서는 스트렙토마이신이 결핵 치료제로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영국의 제약회사들이 이 약을 생산하기 까지는 몇 년이 더 걸렸다. 소설가 조지오웰은 1948년 이 약으로 결핵 치료를 받았는데 영국에서는 거의 최초였다. 옵저버(Observer)지의 편집자인 데이비스 애스트로, 보건부장관인 애뉴린 비번등을 통해 동물농장의 미국 내 저작권으로 약값을 내고 스트렙토마이신을 공급받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조지오웰은 스트렙토마이신에 반응하지 않았고 심한 부작용을 겪었다. 그는 남은 약을 자신이 치료받던 글래스고우의 헤이미어 병원에 기증하였다. 의사 두 명의 부인들이 이 약을 먹고 완치되었다. 영국 의학연구위원회(MRC)에서는 스트렙토마이신의 효과를 보기위한 임상시험 환자를 1946년에 모집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무작위임상시험이다. 즉 편향을 없애기 위해 같은 수의 환자들을 무작위로 두 개의 군으로 할당한 다음에 스트렙토마이신과 플라세보(또는 대조군)를 투여하였다. 임상시험은 1948년에 결과가 나왔는데 스트렙토마이신이 효과가 있다는 분명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스트렙토마이신이 도입되고 이후에 또 다른 약들이 개발되면서 결핵으로 인한 사망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약물이 개발되기 전부터 결핵은 감소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핵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가난한 나라에서는 수백 만 명이 결핵으로 희생된다. 아일랜드에도 결핵이 남아있는데 주로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노인, 이민자 들이 걸린다. 요즘 결핵 환자들은 일반적으로 집에서 치료를 받고 요양소는 다른 용도로 사용이 되고 있다. 성스테핀 병원의 코르크 요약원은 지금은 새로운 재난인 정신병원을 치료하는 병원으로 사용된다. 나의 외할아버지도 폐결핵을 걸려서 1960년 후반에 몇 달 동안 성스테핀 병원에 입원했다. 아이들은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멀리 일층 발코니에서 유령처럼 홀로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1887년 매사추세츠 로웰에서 출생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장티프스로 30대 초반에 죽었고 그래서 과부가 된 그의 어머니는 아일랜드로 돌아와서 친척들의 도움을 받았다. 수백 만 명씩 죽게 했던 장티프스는 예방접종과 위생이 좋아지면서 거의 사라졌다.

1956년 코르크지역에서는 바이러스 질환인 소아마비가 유행하였다. 수백 명의 어린이들이 소아마비에 걸려서 근육마비와 손실이 왔다. 호흡근이 마비된 경우에는 밀폐된 철제용기에 몸을 집어 넣고 음압으로 숨을 쉬게 하는 철의 폐(iron lung)에 의지해야 했다.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은, 위대한 중동특파원이었던 패트릭 콕번(Patrick Cockburn) 같이 장기간의 입원치료와 여러 차례의 정형외과 수술을 받아야 한다. 수천 명이 도시를 벗어나서 스스로를 격리하였다. 이때 소아마비에 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육십 대 또는 칠십 대 초반인데 다리를 절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소아마비 앓았던 사람이 7,500명에서 만명 가량 아일랜드에 살고 있었다. 콕번은 망가진 아이(The Broken Boy)라는 회고록을 썼다. 소아마비가 치명율은 콜레라, 장티프스, 말라리아, 황열 등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낮았지만 나병이나 천연두 같이 몸의 형태를 변화시키고 장애를 초래하기 때문에 매우 20세기 후반의 에이즈만큼이나 공포스러웠다고 적었다. 미국의 미생물학자인 죠나스 쇼크(Jonas Salk)1950년 초반에 예방접종을 개발해서 1955년에 첫 번째 임상시험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의심의 여지없이 효과 입증되었다. 쇼크백신은 주사로 투여되는데 1961년 알베르트 사빈(Albert Sabin)이 개발한 먹는 약 백신으로 대체되었다. 나는 학생 때 이 예방접종약을 설탕덩어리와 함께 먹었다. 소아마비는 최소한 부유한 나라에서는 사라졌다.

어린이 또는 빌리 같은 청소년의 죽음은 대부분의 인류역사에서 매우 흔한 비극이었다. 오래된 묘지를 거닐면 죽어간 어린이 투성 이었다. 그런데 20세기 초반에 혁명적인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의 목숨을 앗아간 감염병이 치료되고 백신으로 예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885년과 1985년 사이에 미국과 유럽의 영아사망률은 천 명 당 140(아이 7명 중에 1명이 사망)에서 5(200명중에 한명)으로 떨어졌다. 기대여명은 50세에서 거의 80 세로 높아졌다. 출산하다가 사망하는 비율인 모성사망률은 1930년 영국에서 250명중에 1명이었는데 현재 10 만 명 중에 8(12,500명 중에 1)으로 낮아졌다. 출산 중에 사망하는 것은 너무 드문 일이 되어서 생기면 국가적인 뉴스가 될 정도이다. 결핵 환자 대부분은 지속적인 항생제 치료로 회복된다. 천연두로 사망한 사람은 흑사병과 1,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사람을 합친 것 보다 많았는데 세계보건기구는 1980년에 천연두는 박멸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매우 제한적인 능력을 보여줬던 의료가 갑자기 기적 같은 효과를 보여주었다. 193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약 50년간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의료의 황금시기가 있었다. 미국 의사이자 수필가인 루이스 토마스(1913-93)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의사가 된 1930년대에는 주요 위협은 결핵, 테타누스, 매독, 류마티스 열, 폐렴, 뇌수막염, 소아마비 그리고 모든 종류의 패혈증이었다고 썼다. 이러 질환들은 암, 심장병, 중풍처럼 우리를 걱정하게 만들었는데 1930년대와 40년대의 중요한 질환들은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

나는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의학을 공부하였는데 의학의 황금시대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 때 의학의 헤게모니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가장 위대한 비판자는 이반 일리히(Ivan Illich)였다. 일리히(1926-2002)는 오스트리아의 사제이자 철학자 사회비평가였다. 1975년에 발간된 그의 책 의학의 복수(Medical Nemesis)’는 유명한 경고로 시작하고 있다. “의료는 건강에 주요한 위협이 되고 있다‘. 1970년대 지성계의 슈퍼스타였던 그는 지금은 거의 잊혀졌다. 그의 핵심적인 주제는 기관화(institutionalization)가 서구문명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현대의 기관은 일리히가 지적한 대로 역설적인 역생산성(paradoxical counterproductivity)의 특성이 있는데 이는 기관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공교육은 무지로 이끌고 현대의 교통은 교통마비와 환경문제를 초래하고 보건의료는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그가 1970년에서 1975년 사이에 출간한 일련의 책들; ’학교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 ’성장을 멈춰라(Tools for conviviality)‘, 그리고 가장 유명하게는 의학의 복수(Medical Nemesis)‘로 이 문제들을 정교하게 다뤘다. 10개 국어를 하는 뛰어난 학자가 대학에 나타나면 수많은 군중이 모였다. 1978년 더블린대학 강연에서는 8천명의 청중이 모였다. 1974년 에딘버러에서 리차드 스미스(Richard Smith, 나중에 영국의학회지 BMJ 편집장이 됨)라는 의과대학 학생이 완전히 매료되었는데 이반일리히의 강연을 들었을 때 종교적 체험 같은 전율을 느꼈다. 카리스마 넘치고 열정적인 사람이 에딘버러의 화석같은 교수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일리히는 의학은 인구집단의 전반적 건강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토마스 맥퀘온(Thomas McKeown)이라는 역학자도 한 바가 있는데 그는 위생, 영양, 주택이 건강에 더 중요하게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맥퀘온은 의사들은 건강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일리히는 한발 더 나아가 의사들이 위험하다고 주장하였다. 일리히는 기관화된 현대의학이 자체의 의식과 도그마를 갖춘 새로운 종교이고 의사들은 새로운 사제라고 비판하였다. 의사들의 독점과 우월함을 비판하면서 현대의학이 건강을 해치고 있다고 있다. 건강을 위해 조직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기관으로 조직되었고 치료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을 아프게 만든다.‘

이것은 사람을 흥분되게 하는 일이었다. 일리히는 신봉자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존 브래드쇼(John Bradshaw)라는 영국의사는 작가가 되기 위해 의학을 포기했다. 그가 1978년 쓴 시험대에 선 의사들(Doctors on Trial)은 일리히에 대한 헌정작으로 의학의 복수의 주장을 재차 강조한 내용이었고 서문은 일리히가 썼다. 브래드쇼는 일리히를 가리킬 때 예언자라는 말을 종종 썼고 자신을 다소 모호한 일리히 이론의 해석자로 자처했다. 마치 세례요한과 예수의 관계처럼. 브래드쇼는 1981년 우리 대학에서 있었던 논쟁의 연자로서 의학이 건강에 위협이 되고 있다는 동의안을 제기하였다. 그 논쟁은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몇몇 의사들은 일리히와 브래드쇼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폄하하면서 동의안에 반대의견을 냈다. 나는 술집에서 브래드쇼를 발견해서 우리의 영웅인 이반 일리히에 대해 활발하게 얘기를 나눴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논쟁에 취했는지 아니면 맥주에 취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건강에 위협이 되는 직업을 위해 수련받고 있다는-의아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다른 어떤 전문직보다 의학은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지배한다. 졸업 후에 나는 과도한 직무에 소모되었다. 몇 년 동안 내 삶은 주말의 호출과 졸업 후 시험으로 점철되었다. 나는 항상 눈앞만 쳐다보았다. 다음 일, 다음 자격시험. 여러 해 동안 이런 삶의 방식과 생각을 포용하고 살았다. 물론 이런 삶이 무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의료분야의 경력구조와 전문직에서 성공을 위해 통과해야할 절차가 너무 견고하고 명확하게 밝혀져 있어서 경력을 쌓으려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주어진 환경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나는 다양한 수련과정을 거쳐 천천히 영국국가의료서비스의 수련기관의 전문의에 이르는 사다리를 천천히 올라갔다. 젊은 전문의로서 바래새인 같은 존재-기관과 전문가 문화의 매개체-가 되어갔다. 40살 때 종신근무를 보장 받았고 남은 인생동안 잘 짜여진 경로를 지속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40대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구체적인 사항을 말하기는 너무 지루하고 너무 개인적인 일이다. 50살에 일련의 사건들을 조사했을 때 나 자신인 어느 정도 밝은 미래를 방해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방해는 무의식적으로 의도적인 것이었다. 진짜 문제는 신념이 없어진 것이다. 일종이 배신이었다. 만화주인공인 윌리 코요테는 그가 더 이상 믿지 않을 때 협곡에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가 상황을 모르는 한 행복하게 공중에서 떠 있지만. 오래된 방식의 환자진료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외 다른 모든 것, 의학연구, 관리주의, 프로토콜, 매트릭스, 그리고 심지어 진보에 대한 신념까지 잃어버렸다. 나는 의료가 과잉이 기관화된 문화처럼 되었고 이반 일리히가 주장한 대로 건강에 위협-70년 중반의 많은 의사들에게는 바보 같은 주장처럼 보였던-이 된 것이 사실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의학의 황금시대가 끝나갈 무렵에 의사가 되었고 그 이후로 35년간 세 개 국가의 많은 병원에서 일해 왔다. 나는 대중들이 의학에 대해 회의를 품는 것을 목격했고 의료-산업 복합체가 전세계를 지배하고 나의 직업이 타락하는 것을 목격했다. 의료-산업 복합체는 단지 대형 제약회사라는 전통적인 악당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전문적인 상업적인 집단- 생의학적 연구, 건강식품 산업, 의료기구 제조업, 왕립학회, 의과대학, 보험회사, 자선단체 계속 늘어나고 있는 감독 및 평가기관, 그리고 로비스트와 경영전문가 같은 이차적인 기생적 전문직을 모두 포함한다.

각 시대마다 고유의 어리석음이 있는데 의학은 현재 유행의 가장 중요한 척도이다. 새로운 기술, 개인행태의 새로운 유행, 경영, 교육의 얼리어댑터인 것이다. 의료전문직들은 변화에 저항하거나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새로운 것에 열광한다. 만일 당신이 내년에 무엇이 세계를 움직일지 알고 싶다면 지금 의학이 흥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된다. 연구자든 임상의든 의사들은 마켓팅의 언어와 기풍과 심리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지금 모두 판매중이다.

의학은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지배력을 확장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서 기대수준을 너무 높이기 때문에 실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나의 전문가로서의 삶은 황금시대의 마지막이자 미충족 비현실적 기대와 실망의 시대의 도입부에 시작하였다. 환자들, 의사들, 그리고 크게는 우리 사회가 의료-산업 복합체의 희생자이자, 봉이자 노예이다. 우리는 치료하고 때로는 과잉치료하지만 치유하지는 않는다. 나의 35년의 경력은 재미, 당혹, 창피함이 뒤섞여 있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녀의 폐렴과 빌리 심촌의 죽음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빌리 심촌의 죽음은 너무 비극적이어서 조부모들이 아픔을 극복할 수 없었다고 했다. 지금 아일랜드에서는 자궁암 검진에서 암 초기단계를 놓친 사례들이 발생해서 의료-정치 위기 상황에 놓여있다. 비록 이런 종류의 검진이 거짓양성과 암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음에도 언론과 기회주의적 정치인들이 대중의 분노를 일으키려고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의료서비스가 얼마나 나쁜지 말하고 있는데’, 나의 어머니 생각에 잠겨서, ‘그 사람들은 1940년대로 돌아가 봐야 나쁜 의료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들은 사람들이 너무 오래 살기 때문에 생긴다

by 카이로스 | 2019/08/04 22:48 | 의학 | 트랙백 | 덧글(1)

의학은 치료될 수 있을까?-에필로그

의학의 황금시대에 의학은 엄청난 명성을 얻었고 인간의 삶과 죽음은 의료화되었다. 전세계적으로 의학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의료-산업 복합체는 엄청난 비용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미약한 위안만을 주고 있다. 복합체의 주된 걱정은 그 자체의 생존이고 지속적인 지배력이며 윤리적으로는 황금시대의 과학적 이상을 배신하고 있다. 임상진료 또한 방대한 산업이 되어서 주로 퇴행성질환과 노화를 다루면서 전체 인구집단을 검진, 질병인식향상, 질병 팔이, 예방적인 처방 등을 통해 환자화로 몰아가고 있다.

환자들은 점점 더 의학 때문에 불행하다. 왜냐하면 의학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 또래는 되는 사람들만이 의학의 황금시대 이전에 진짜 아프다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들 역시 불행하다. 그들은 자신의 힘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점점 더 많은 책임과 요구가 자신 앞에 놓여 있다. 병원은 노인들을 처리하는 곳이 되었고 인간 감정과 행동의 정상적인 변이가 약물치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존재론적 문제들이 의사들이 풀어할 문제로 되고 있다. 의사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의학은 유사 종교가 되고 있다. 환자들이 기존의 믿음을 배신하고 포기하도록 부드럽게 유도하여야만 한다. 조지 버나드쇼(George Bernard Shaw)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건강을 다 사용해버리고 더 오래 살지는 말라고 충고했다. 우리도 비슷하게 우리 환자들을 맥코믹(James McCormick)이 얘기한 변화된 쾌락주의의 삶으로 이끌도록 격려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피할 수 있는 위험들로 둘러싸인 여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만끽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 의사들은 우리의 지식을 과도하게 높게 평가하고 환자들에게 과도하게 약속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죽음과의 전쟁은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의 에너지를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가지고 있는 것을 균등하게 공유하는데 다시 초점을 맞추고 치유와 고통 완화를 중시하는 새로운 의학으로 향해야 한다.

현재 의학의 우선순위는-중세의 성당 같은 수련병원과 생의학적 연구를 정점으로 하고 지역사회와 호스피스는 바닥으로 하는-반대가 되어야한다.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으로 낙관하지는 않는다. 미래에도 강력한 사회적 힘이 현재의 컨센서스가 지속되도록 보장할 것이다. 이런 사회적 힘에는 모든 인생의 상업화, 거대 다국적기업의 과도한 파워, 정치와 전문직의 쇠락, 순응과 규제의 경직화, 안전에 대한 숭배,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의 나르시즘,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의 영적인 왜소화가 우리를 지속적 감시와 유지를 필요로 하는 디지털화된 기계로 축소시키고 있다. 의료-산업 복합체라는 것이 광대하고 조직화되고 지각력있는 음모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만큼이나 오류투성이고 비이성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강대해져서 의학이 이반 일리히가 말한 티핑포인트-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를 끼치는-를 지나고 있다. 의학 분야에서 어떤 형태이든 새로운 발전이나 치료법이나 또는 패러다임이 발표되면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첫째는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가? (Cui bono?) 둘째는 그것 때문에 인생이 더 행복해지는가? 이 질문들을 유전체학, 디지털 건강, 질병인식캠페인에 물어보면 대답은 명백하다.

기질적으로 나는 수도원이나 도서관이 더 어울리는 사람인데 운명이 나를 먼지 날리는 경기장으로 불러내었다. Aoibhinn beatha an scolaire (학자의 삶은 얼마나 달콤한가?) 17세기 무명의 아일랜드 시인이 쓴 말이다. 나는 때로는 학자로 사는 것이 어떠했을까 생각해보지만 이것은 나태난 일이다. 나는 대신에 고통과 질병, 죽음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고 동시에 친밀감, 유머, 삶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나는 견기기 어려운 책임감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란다. 나의 젊은 동료들은 내가 젊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유행이나 오류에 쉽게 유혹된다. 하지만 이런 것을 지적하는 일은 그들을 불쾌하게 할 것이다. 나는 내 주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파악하고 의학이(임상의학이) 회의론자에게는 어려운 직업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30년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적 회의론은 동정심만큼이나 의료행위에 필요하다. 의사들은 인간적인 동시에 철학자 흄(Hume)같은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정년에 다가옴에 따라 이렇게 하는 것이 아주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덜 어렵다. 나는 환자를 볼 때 소송이나 프로토콜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친구나 친척 대하듯이 환자를 대한다. 솔직히 의사는 그렇게 하여야 한다. 나는 이런 솔직한 태도가 환자들에게 자신들이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는 것을 보고 즐거운 마음으로 놀라곤 한다. 의사들과 환자들 모두 의료-산업 복합체의 노예가 되어 왔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반란을 해야 할 때이다. 우리 사회는 노인과 죽음을 새로운 방식으로 수용해야 한다. 의사들은 전문성과 임상적 판단이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우리가 하는 일에 핵심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프로토콜이나 정부의 지시, 처벌의 공포 뒤에 숨으면 안되고 단지 삶의 조건이 좀 더 견딜만하게끔 해주면 된다. 과학과 진료의 학설은 항상 새롭게 바뀌지만 의료행위의 본질은 동일하다. 우리는 완치 시키지 못할 수 있지만 여전히 치유를 할 수는 있다.

나의 젊은 시절은 지금 나의 변절을 승인할 것이다. 나는 이 책으로 이반 일리히, 그의 제자인 존 브라드쇼(John Bradshaw), 체코 출신의 비판론자인 페트르 스크라바넥(Petr Skrabanek), 의료사상가인 리처드 아셔(Richard Asher)의 영혼이 어느 정도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by 카이로스 | 2019/08/03 13:55 | 의학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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