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06일
나는 진정한 마라토너다.
눈을 떠서 시계를 보니 5시17분이다. 알람을 20분에 맞췄는데 알람 없이 거의 정확하게 깼으니 징조가 좋다. 기억나지 않는 꿈을 몇 편 꾸기는 했지만 잠도 비교적 잘 잔 편이다. 밖을 보니 아직 어두운데 다행히 비가 오지 않는다. 기상청에서 주말 내내 비가 올 거라고 그렇게 겁을 줬는데 토요일에도 안오고 일요일 새벽 현재도 안 오고 있다. 어제 밤에 달도보고 별도 봤으니 비가 안 오는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기상청을 욕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기가 막히게 운이 좋다는 것인데 누구 욕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기상예보가 맞으면 좋지만 틀릴 경우는 비가 온다고 했다가 안 오는 위양성(false positive)이 안 온다고 했다가 비가 오는 위음성(false negative)보다는 훨씬 욕을 덜 먹을 것 같다. 의학 분야도 마찬가지인데 오진을 하더라도 위양성인 경우에는 질병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을 때 환자들이 기쁜 나머지 의사 탓을 하지 않지만(온갖 마음 고생을 하고 확진을 위해 돈도 많이 썼으면서도) 위음성인 경우에는 의사를 고소하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방어진료를 하게되고 그러다 보니 의료비가 비싸지는 것이지만 하여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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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준비한 떡 두 조각을 오렌지 주스와 함께 마시고 커피를 마신 후 화장실 업무까지 말끔히 처리하고 드디어 잠실운동장으로 출발을 했다. 그런데 용서 고속도로 중간쯤에서 비가 오기 시작한다. 탄천 주차장에 주차했을 때는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보슬비면 예정대로 달리고 장대비면 포기하려고 했는데 이건 분명 장대비에 더 가깝다. 그래도 일부러 온 게 아까워서 출발지인 운동장를 가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7시10분. 이제는 결정을 해야 한다. 다행히 빗줄기가 현저히 약해졌다. 특히 6개월 전부터 준비한 거사를 포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마누라와 딸 생각도 난다. 선크림을 꺼내 얼굴에 바르면서 속으로 외쳤다. 그래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 루비콘 강을 건넜다. 옷을 갈아입고 짐을 맡겼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고 5시간 후에는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화장실을 다시 가려다가 줄이 너무 길어 포기하고 출발지로 향했다. 삼성SDS에서 단체로 출전했는데 '백혈병어린이돕기 운동'을 한단다. 대기업에서 병마에 시달리는 어린이를 돕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고 어린이에서 가장 흔한 암종이 백혈병이니 말이 되긴 하지만 영 찜찜하다. 자기 회사 노동자들을 집단적으로 백혈병에 걸리게 하고 산재도 인정을 안 해서(원래 산재 인정은 회사가 관여할 일이 아닌데 그걸 엄청난 영향력을 동원해서 인정을 못하도록 해서) 자기 회사를 위해 헌신한 노동자를 두 번 죽인 회사가 다른 질병도 아니고 바로 그 백혈병에 걸린 어린이를 돕겠다고 하니. 참 이걸 너무 무신경하다고 해야 하나 아님 너무 뻔뻔하다고 해야 하나. 물론 삼성SDS 자체는 백혈병과 관련이 없을 수 있고 특히 오늘 뛰러 나온 사람들이야 아무 상관이 없을테니 더 뭐라 할일은 아니겠다.
다행히 비가 그쳤다. 준비했던 우비도 벗어던지고 출발점에 섰다. 그런데 다시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한다. 어차피 우비를 입고 뛸 것도 아닌데. 이제 모르겠다. 행사가 시작되고 내빈들이 인사한다. 혹시 박원순 시장이 나왔을 까 했는데 안 나오고 대신 정무부시장이 나왔다. 2년 전 중앙마라톤에서 내 생애 처음 공식적인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는 오세훈 시장이 나왔었는데 차이라면 차이다.
드디어 출발.
함께 뛰어나가다 오버페이스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페이스를 늦췄다. 10분 달린 후에 원래 계획대로 30초 정도 걸었다. 이번 플코스에 임하는 나만의 비장의 무기가 두가지 있다.
첫번째는 달리고 걷고 달리기(run-walk-run)인데 미국 사람이 쓴 마라톤 책에 나와있는 건데 이 책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었다. 노동 강도(업무시간이 아니라)가 현저히 떨어진 현대에 가장 많은 직업병은 아이러니하게도 근골격계질환이다. 그 이유는 무거운 물건을 다루기 때문이 아니고 작업이 자동화되면 똑 같은 동작(비록 동작 하나 자체는 힘이 별로 들지 않지만)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즉 같은 동작을 쉼 없이 반복하다보면 거기에 사용되는 근육이 쉴 시간(회복될 시간)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실험실에서 팔펫팅을 반복하고 컴퓨터에서 마우스만 쓰는 사람에서 손과 팔목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몇 시간이고 쉼없이 달리기를 하면 당연히 다리에 있는 여러 근육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부상을 입을 확률이 아주 높아진다. 반면에 중간 중간 걷기를 하면 달리기에 주로 사용되던 근육이 쉴틈(회복될 틈)이 생기기 때문에 피로도도 훨씬 덜하고 부상의 위험도 크게 감소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쉼없이 달린다. 속도를 내겠다는 욕심도 있고 최소한 걷지 않는 게 러너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일본의 유명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리 적어 둔 묘비명에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고 썼다. 나도 마라톤을 처음 시작하면서 아무리 천천히 뛸지언정 걷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의학적으로 볼 때 부상의 지름길인 것이다. 물론 계속 뛰는 것의 물리적 정당성이 있기도 하다. 관성의 법칙에 따르면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 하고 정지한 물체는 계속 정지해있기 때문에 중간에 쉬면 다시 뛰기가 힘든 것은 사실이다. 물리적 법칙과 의학적 지혜의 조화, 거기에 해답이 있다. 달리고 걷고 달리기 방법의 핵심은 다리에 무리가 오기 전에, 초반부터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10분 달린 후에 30초 동안 걸었다. 그리고는 2키로미터마다 30초 내지는 일분씩 걸었다.
출발할 때 화장실 업무를 한번 더 보지 못해서 그런지 뒤가 조금 무겁다. 뛰다가 근처에 있는 건물에 들어갔는데 화장실 문이 잠겨서 실패했다. 조금 더 뛰다가 공공시설 같아 보이는 곳에 들어가 드디어 성공했다. 매일 세 번씩 밥을 먹고 한번 이상 화장실 가는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평생해야 한다는 것이 정말 거추장 스러운 일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하루 중 한두 시간만 투자하면 나머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이니 그리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속을 비우니 몸이 가벼워진다. 오늘 잘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하는데 장난이 아니다. 수중마라톤이라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처음 마라톤 풀코스가 수중마라톤이라니. 팔자려니 했다. 천둥 번개가 안쳐서 그나마 다행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비가 올 때 뛰기가 낫다고 말하기도 한다. 원래 장거리 달리기는 다리 근육이 충분히 훈련이 된 경우에는 결국 어떻게 효과적으로 몸에 에너지를 공급하면서 동시에 발생하는 열을 식히느냐의 문제이다. 인간이 어떤 동물보다도 장거리 달리기를 잘하는 것은 다리 근육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열배출을 효과적으로 잘하기 때문인 것이다. 비가 계속 오니 몸에서 열이 생기는 족족 날아 가버려면 오히려 뛰기가 편한 면도 있다. 그리고 수중 마라톤, 이거 아무나 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마라톤을 많이 달려도 하늘이 도와주면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비가 너무 많이 온다. 평생 맞은 비보다 더 많은 비를 맞은 것 같다.
뛰다가 5시간 페이스메이커를 만났다. 어떻게든 따라 붙기로 했다. 42.195km를 제한시간인 5시간 안에 들어오려면 대략 10km를 7분 안에 뛰는 소위 7분주를 해야 한다. 스톱워치를 차고 왔고 매 키로마다 간판이 있기 때문에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무리지어 달리는 것이 편하다. 페이스메이커는 마라톤의 베테랑들이 자기 기록은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가이드가 되어주는 자원 봉사자다. 아마추어 마라토너의 로망이라고 할 수 있는 3시간 페메부터 시작해서 대회제한 시간인 5시간 페메까지 시간대별로 있어서 자기 목표시간에 맞는 페메에 맞추어 뛰면 된다. 페메는 질주만이 있는 도로상에서 등대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많이 회자되는 사회의 멘토같은 사람이다. 남은 인생을 우리 사회의 페메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10킬로에서 파워젤을 하나 먹었다. 달리기를 하다보면 포도당을 우선 쓰기 때문에 몸에서 탄수화물이 고갈된다. 물론 지방 같은 다른 영양소를 사용해서 계속 달릴 수는 있지만 문제는 포도당만 이용하는 뇌에서 포도당이 부족하면 달리기 자체를 비토해버린다. 뛰는 이유 내지는 의욕 자체가 사라져버리면 몸은 멈추고 마는 것이다.
14키로 쯤 뛰다보니 맞은 편 차선에서 선두주자들. 케냐에서 온 특급선수들이 벌써 반환점을 돌아서 달려온다. 아무 표정없이 일정한 페이스를 달리는 폼이 마치 달리는 기계 같다. 차를 통행시켜야 하니 인도 쪽으로 붙어서 달리라는 차량방송이 나오기 시작한다. 여태까지는 특급선수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으면 달렸는데 이제 부터는 더 이상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마라톤같이 평등한 운동이 없다. 누구나 전과정을 자기 다리로만 움직여 이동해야 한다. 예외는 없다. 물론 출발시간이나 도로통제에서 엘리트 선수들이 우선이지만 이정도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사회가 딱 마라톤만큼만 평등하면 좋겠다. 그나저나 다리에서 조금씩 피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달리고 걷고 달려서 드디어 25키로 좀 가니 반환점이 나타난다. 11시10분을 넘으면 시간 초과로 회수차량을 타야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뒤에서는 경찰차에서 너무 무리하지 말고 차량을 이용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 다행이 13분정도 여유가 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바로 뒤에서 압박을 해올 것이다.
33키로 지점.
그 이상을 뛰어본 사람이 수도 없이 많겠지만 나로서는 한 번도 뛰어 본 적이 없는 본인미답의 경지이다. 사실 과연 풀코스를 뛸 수 있을지 계속 걱정을 하면서도 내심 믿은 것이라고는 지난 2주간 집중적인 연습을 통해서 32키로 까지는 뛰어봤다는 것이다. 동네에 있는 트랙이 650미터인데 2주전에는 40바퀴, 즉 26키로를 뛰었고 지난주에는 50바퀴, 즉 32.5키로를 뛰었는데 피로도가 40바퀴를 뛰었을 때와 비교해서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보다 한 10바퀴만 더 뛰면 되는 것이니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이번 대회에 임하면서 나만이 가지고 있던 두번째 비법은 달리면서 착지할 때 발 앞부분으로 하는 것이었다. 보통 마라톤 책에서는 단거리는 발 앞꿈치로 착지하는게 맞지만 마라톤에서는 발뒤꿈치부터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발뒤꿈치로 찾지하고 발 전체를 지면에 접촉시키면서 발가락으로 차준다나 어쩐다나.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특히 본투런(born to run)이라는 훌륭한 책을 쓴 맥두걸 같은 사람은 이게 나이키의 농간이라고 한다. 원래 인간은 맨발로 뛰어다니는데 이 때 당연히 발 앞부분으로 착지를 하게 된다. 즉 진화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맞다. 맨발로 한번 뛰어보면 무슨 소린인지 대번 알 수 있다. 그런데 운동화회사에서 쿠션이 있는 운동화를 팔아먹기 위해 뒤꿈치에 쿠션을 잔뜩 넣고 뒤로 착지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뒤로 착지하면서 쿠션이 없는 신발을 신으면 바로 부상이 온다. 그러니 대부분이 마라토너들이 다른 것은 몰라도 운동화를 좋은 것을 사야한다고 조언하는데 발 앞 부분으로 착지를 하게 전혀 딴 얘기가 되버리는 것이다. 내 신발도 쿠션이 잔뜩 들어가 있는 신발인지만 뒤꿈치로 착지가 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의식적으로 발 앞 부분으로 착지를 하도록 노력하였다.
30키로 후반에 들어가면서 점점 힘들어진다. 5시간 페이스메이커를 쫓아가기가 쉽지 않다. 심장이 묵직해지는 느낌이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점점 한계에 다다르는 것일까?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중환자실에 몇개월 누워 계신 후에는 침대에 앉는 것, 두발로 서는 것, 걷는 것 하나하나가 사투였다. 평생을 걷고 사셨는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면 길쭉한 물건을 세워 놓는 것, 그것도 두발로만 세우는 것은 그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단지 두발로 걷는 다는 것 또는 뛴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다. 오죽 하면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생물 종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두발로 걷거나 뛸까. 두발로 뛰기라는 기적 같은 일을 몇시간째 하고 있으니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너무 힘들다. 멀리서 잠실롯데가 보인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40키로 지점을 지나면서 시계를 보니 5시간에서 20분정도가 남아있다. 잘하면 5시간 이내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다. 드디어 잠실운동장 입구. 마누라 얼굴이 보인다. 이 엄청나 도전에서 나를 응원해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작은 딸도 같이 왔지만 아빠의 마라톤에 그다지 관심은 없다. 부모자식관계가 내리사랑인 걸 어쩌랴. 인정하지 않으면 자기만 속이 아프니 인정할 수밖에. 드디어 트랙에 들어섰다. 트랙을 한바퀴 돌아야 골인이다. 시간이 3분밖에 안 남았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로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드디어 골인. 정확한 기록은 좀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5시간 안에 들어왔다(4시간 59분 28초). 해낸 것이다.
오늘 하루가 인생 하나를 산 것 같다. 무엇보다 내 몸이 너무 고맙다. 평생을 책상머리에 앉아 살면서 특별히 몸에 대해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커다란 성취가 가능하도록 견뎌준 몸이 너무 고맙다. 그리고 마누라가 너무 고맙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마라톤은 커녕 달리기를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달린 것은 순전히 마누라가 달리기 때문이다. 딱 망둥어가 뛰니 꼴뚜기도 뛴다는 속담대로였다. 게다가 첫 완주를 축하하는 현수막까지 준비해와서 나를 감동시켰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마누라 밖에는 없다.
처음으로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세상이 바뀌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엄청난 성취를 해냈는데 세상은 그대로인거다. 내일 줄줄이 있는 약속도 그대로고 내가 말하지 않으면 내게 그렇게 엄청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존재의 본질은 관계이기 때문에 내가 바뀌면 세상도 바뀌게 된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말이다. 마라토너로서의 남은 인생이 기대된다.
# by | 2011/11/06 22:12 | 일반 | 트랙백 | 덧글(0)



